할아버지네 집이 가까워질수록 마음이 자꾸만 무거워지면서 불안하다.
지금 말씀 드릴까도 생각해 봤지만 용기가 나질 않아 말도 못하고 도살장에 끌려가는 소처럼 말 없이 길바닦만 바라보면서 걷는데
"학교가 멀지?"
대답 대신 고개만 끄덕이자
"너 자전거 탈줄 아냐?"
뚱딴지 같은 말씀을 하신다.
"네" "언제 배웠냐?" "일년전에 배웠어요" "자전거도 없는데 어떻게 배웠냐?" "창수한테 배웠어요" "자전거를 탈줄 알면 자전거를 사줘야 겠네" "정말이세요?"
자전거를 사주신다는 말에 귀가 번쩍 뜨여서 큰 소리로 대답을 하자
"자전거 사주면 공부 더 열심히 할거지?" "자전거 사주시면 일등 할게요" "이 번달 월사금은 안 내도 되니 그 돈으로 사 주마"
자전거를 사 주신다는 말씀에 답답하던 가슴에 구멍이라도 뚫린듯 기쁘기는한데 할아버지네
집이 가까워 오니 걱정이 앞선다.
저전거를 사주신다는데 어제 일이 있어서 아버지 마음이 바뀌지나 않을까 하는 생각에 마음만 더욱더 무거워 진다. 이제 산 모퉁이만 돌아서면 할아버지네 집이다. 할아버지는 지금 쯤 눈에 불을 켜고는 나를 기다리고 계실 것이다. 산수갑산을 가는 한이 있어도 이제는 말씀을 드려야 한다.
아버지를 힐끔 쳐다보니 선생님을 만날 생각에 뭔가를 생각하시는듯 보인다. 모퉁이를 돌아서자 할아버지네 집이 눈 속으로 들어온다.
"아버지!" "왜?" "드릴 말씀이 있는데요" "뭔 말이냐?" "사실은 어제......"
어제 일을 말씀을 드릴려고 하니 가슴이 떨려서 말이 나오질 않는다.
"무슨 이야기인데 그렇게 뜸을 드리냐? 무슨 일인지 어서 말해 보거라"
다른 때 같으면 무슨 일인지 빨리 말 하라고 다그치셨을 텐데 오늘은 부드러운 목소리로 정답게 말씀을 하신다. 평소와는 다른 아버지의 대답에 말씀을 드려도 괜찮겠다는 생각이 들면서 이럴 때 빨리
말씀드리라고 뇌가 재촉을 해댄다.
"아버지! 사실은...."
말씀을 드리려니 입이 떨어지지가 않는다.
"왜? 무슨 걱정이라도 있느냐? 말을 못 하게..."
크게 심호흡을 하고는 이실직고를 하려는데 먼저 간 형이 헐래벌떡 뛰어 온다.
"형! 왜 학교로 안 가고 다시 와요? 뭐 빼 놓고 온 거라도 있어요?" "너! 나 좀 보자" 나를 잡아 끈다. "무슨 일인데 그러느냐?"
이상하다는듯 아버지가 묻자
"별일 아니에요 어르신...!"
형에 끌려서 서너 발자국 뒤로 물러서자
"아버지께 말씀 드렸냐?" "아직 말씀 못 드렸어요" "잘 했다!" "잘 하긴! 뭘 잘해요?" "말씀 안드려도 되게 생겼다" "말씀을 안드려도 된다니 그게 무슨 말이에요?" "어젯밤에 밀밭 집 할아버지가 돌아가셨데" "뭐라구! 할아버지가 돌아가셨다구?" "그러니 말씀 안드리길 백 번 잘한 일이지" "그게 정말이야?" "저길 봐라 마을사람들이 할아버지네 집 앞에 모여들 있잖아"
번쩍 고개를 쳐들고 보니 형 말대로 할아버지네 집 앞에는 사람들이 여럿 모여 있고 바람결에 들릴 듯 말듯 통곡 소리가 귓속을 파고든다.
통곡 소리를 듣는 순간 불안 했던 마음이 봄눈 녹듯 녹아 내리면서 한 숨 마져 터져 나 온다.
"야들아! 학교 늦겠다 빨리 가자"
아버지가 돌아보시면서 손사래를 치신다. 뛸듯 기쁘다. 룰루랄라 휘파람을 불면서 아버지께로 다가가니
"무슨 좋은 일이라도 있느냐? 니 얼굴이 금새 밝아졌다.“ "좋은 일은요....아무 일도 없어요"
속 내를 숨기려니 나도 모르게 저절로 입이 터진 팥자루처럼 터진다.
웃음을 참으면서 생각을해 보니 할아버지가 돌아가셨다는데 웃는다는 것은 인간의 도리가 아닌 것 같아서 혀를 깨물면서 웃음을 참고는
"밀밭 집 할아버지가 돌아가셨데요" "밀밭 집 할아버지가 돌아가시다니! 어느 집을 말 하는 거냐?" "저기 보이는 첫집 할아버지가 돌아가셨데요" "언제?" "어제 밤에요" "그래! 그 어른! 지병으로 오랫동안 고생을 하셨는데 결국 돌아가셨구나....!!!!"
아버지는 할아버지를 아시는지 서글픈 표정을 지으시면서 고개를 끄덕이신다.
할아버지네 집이 가까워 질 수록 통곡 소리가 크게 들려오면서 어제 밀서리를 맛나게 드시던 할아버지의 얼굴이 눈에 삼삼 어린다.
"할아버님! 제가 잘못 했구먼유! 다시는 밀서리를 하지 않을테니 하늘나라에서 편히 쉬십시요"
할아버지가 좋은 곳으로 가시기를 마음 속으로 빌어드렸다. 길 옆 밀밭에 밀들도 통곡 소리를 듣고는 할아버지께서 돌아가신 줄을 아는지 살랑살랑 불어오는 초여름 바람에 온 몸을 마구 흔들면서 "서걱서걱"소리내어 울어 댄다.
아!
그리운 옛날이여........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