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정이 넘었는지 하품이 나오면서 잠이 마구 쏟아진다.
잠을 쫓으려고 졸린 눈을 비비고 있는데 갑자기 콩밭에서 뭔가 하얀 것이 움직이는 모습이 보인다.
순간 잠이 화들짝 도망을 가면서 정신이 번쩍 든다.
눈에 불을 켜고는 콩밭을 내다보니 뭔가 콩잎을 갏아먹는 "바삭바삭"거리는 소리가 어둠을 뚫고 귓속으로 파고든다.
토끼가 내려와서 콩잎을 뜯어먹고 있는 것이 분명하다.
두 귀를 쫑긋 세우고는 소리가 나는 곳을 뚫어져라 응시하고 있으려니 털이 흰토끼가 콩잎을 뜯어 먹고 있는 것이 아닌가!
이상한 일이다!
산토끼는 잿빛색인데 흰토끼라니!
추운지방의 토끼들은 적으로부터 몸을 보호하기 위래서 겨울이 되면 털색이 흰색으로 변색을 한다지만 우리나라의 산토끼는 잿빛토끼지 흰토끼는 지금껏 단 한마리도 본 적이 없다.
그렇다면 지금껏 콩잎을 뜯어먹은 토끼는 산토끼가 아니라 집토끼였단 말인가?
화가 머리끝까지 치뻗친다.
누군가 토끼풀을 뜯어다 주질 않아서 뛰어 나왔거나 아니면 일부러 토끼장 문을 열어 놓아 콩잎을 뜯어먹게 한 것이 분명하다.
그러고 보니 우리 밭머리에 사는 심술첨지 강영감탱이 짓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자기네 것은 지푸라기 하나도 소중하게 생각을 하면서 남의 것은 곡식도 우습게 생각하는 천하의 몹쓸 영감탱이가 아닌가?
가끔씩 소를 몰고 들로 가면서도 남의곡식을 고의로 뜯어먹게 하는 영감탱이가 아닌가?
너구나 강염감은 토끼를 꽤 많이 기르고 있지를 않은가.
요놈의 토끼들 오늘 나한테 딱 걸렸다.
몽둥이를 꼬나들고는 움 집을 빠져나왔다.
토끼가 한 마리가 아니고 세 마리나 보인다.
낮은 포복을 하듯 넙죽 엎드려서 살금살금 콩잎을 뜯어먹고 있는 곳으로 기어가는데로 토끼는 도망을가질 않고 콩잎만 걸구들린 놈처럼 맛나게 뜯어먹고 있다.
산토끼 같으면 인기척만 나도 벌써 꽁지가 빠져라 산으로 도망질을 쳤을텐데 토끼앞으로 가까이 기어가도 힐끔힐끔 돌아만 볼뿐 도망을 치질 않고 계속해서 어린 콩잎을 몽창몽창 뜯어먹고 있다.
감영감네 토끼가 확실하다.
요 며칠 강영감님한테 산토끼가 콩잎을 뜯어 먹는다고 귀에 딱지가 앉도록 이야기를 했건만 그럴때마다 영감탱이는 강 건너 불구경하듯 먼 산만 바라보더니 그게 다 이유가 있어서 그랬구나 하는 생각이 든다.
내 앞에서 토끼가 맛있게 콩잎을 뜯어먹고 있다.
그것도 한 마리가 아닌 세 마라씩이나!
몽둥이를 치켜들고는 복날에 개잡듯 눈 앞에 있는 토끼를 내려쳤다.
토끼는 "찍"소리도 한번 지르지도 못하고 죽어 나자빠져 발만 버둥거리고 있다.
옆에 있던 토끼가 힐끔 돌아보더니 동료가 죽어 버드정거리는데도 도망은 가질 않고 계속해서 콩잎만 뜯어먹고 있다.
동료가 죽었으면 도망이라도 가야지 동료에 대한 도리이거늘 아무리 목구멍이 포도청이라지만 계속해서 콩잎을 뜯어먹고 있는 토끼를 보니 눈에서 불이 번쩍 일어나면서 팔뚝에 앉아서 피를 빨아먹고 있는 모기를 잡듯 단매에 토끼 두 머리를 때려 잡았다.
토끼들에게 뜯어먹힌 콩들에 대한 복수를 한 것 같에서 가슴속이 후련하다.
이런 일을 강영감이 아시면 노발대발 하시겠지.
그러나 내게도 할 말이 있으니 걱정될 일은 하나도 없다.
죽은 토끼를 버릴까 생각하다가 밭에 걸어 놓기로 마음을 바꿔 먹었다.
길다란 장대끝에 죽은토끼 세 마리를 매달아서 콩밭에 꽂아 놓고는 소쩍새 울음소리와 풀벌레소리를 들으면서 집으로 돌아와서 잠자리에 누웠다.
피곤하기는 한데 잠이 오지를 않는다.
내일 아침이면 강첨지가 나를 찾아와서 곤두벌레 나대 듯 팔딱팔딱 뛰면서 난리궃을 하겠지?
강첨지가 찾아와서 뭐라고 해도 겁날 것이 없다.
새벽에 잠이 들었는데도 일찍 잠이 깼다.
집이 조용하기만 하다.
꼭두새벽이면 일어나는 강첨지가 지난밤에 집토끼가 세 마리나 죽은 것을 모를리가 없는데 말이다.
얼른 일어나서 콩밭으로 달려갔다.
강첨지는 집앞에서 장죽을 물고는 "뻑뻑" 담배를 피우고 있다가 나를 보더니 "어흠! 어흠!" 큰기침만 할 뿐 아무런 말이 없다.
아직도 토끼가 죽은 줄을 모르는가?
콩밭을 보니 장대끝에 흰토끼가 세 마리나 매달려 있는 것이 보인다.
"어르신! 우리 콩밭에 매달려 있는것이 뭔가요?"
무슨 말을 하는가 들어보려고 한마디 하자
"나는 눈이 어두워서 잘 안봉네 뭐가 매달려 있는가?"
고양이도 낯짝이 있다고 강첨지도 양심은 있는지 쓰다 달다 일언반구 말이 없다.
올해도 콩값이 비싸듯 그해도 콩이 개화시기에 비가 많이 내려서 콩이 흉작이었건만 재수가 있었는지보리를 베어내고 심은 우리밭의 그루콩만은 대풍작을 이뤄서 이년 농사를 지었다.
그 콩으로 동짓날 메주도 쑤었고 고기가 귀하던 시절 가끔씩은 밭고기라고 두부도 만들어 먹었고 비지는 띄워서 비지장도 끓여 먹었는데.
따뜻한 봄이 돌아오면 메주로 간장도 담그고 된장도 만들어 먹었는데.......
지금은 콩이 귀하기도 귀하고 메주 만들기가 힘이 들어서 그런지 콩 끓여서 메주 만들어 본지가 언제인지 기억 조차 가물가물 거린다.
요즘은 두부를 사먹어도 수입콩으로 두부를 만들어서 그런지 옛날에 먹었던 그 두부맛이 나질 않는다.
"신토불이"라고 우리 몸에는 우리밭에서 생산된 것이 좋다는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