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월 첫째주 일요일은 좋던 싫던 우리문중이 모두 모여 조상님들 묘소에 벌초를 하기로 한 날이다.

서울과 청주에 살고 있는 사촌들은 선산으로 바로 가겠다고 조금전 연락이 왔고 부산에 사는 재종들은 비가 오더라도 꼭 온다고 지난밤 연락을 해 왔다.

학교앞에서 지각한다고 멀리서 오는 동생들보다 고향에 사는 내가 늦게 간다는 것은 체면이 서질 않는 일이니 서둘러야 한다.

숫돌에 낫도 문질러 날이 시퍼렇게 갈아놓고 지난해 벌초를 끝내고 지하실 창고에 곱게 모셔둔 예초기도 꺼내 시동을 걸어보니 지하에서 잠들어 계신 조상님들이 놀라서 벌떡 일어나실지도 모를만큼 굉음을 토해내며 팽팽 잘도 돌아간다.
“형님! 예초기가 잘돌아 가네요?” 이웃에 사는 동생이 대문안으로 들어서며 예초기가 고장이라도 났으면 어쩌나 근심하는 말투다.
서둘러 동생이 몰고온 화물차에 예초기와 낫, 갈퀴를 싣고는 선산으로 가려고 시동을 걸었다. 새차라서 그런지 엔진소리가 싹싹한 새색시같고 승차감 또한 안락한 것이 승용차를 탄 느낌이 든다.

차는 금새 시내를 빠져나와 시야가 탁 트인 들녘으로 들어선다. 길섶에는 가녀린 여인의 고운 자태인양 활짝 핀 코스모스가 산들바람에 여덟 이파리 고운 꽃잎을 하늘거리며 벌초를 하러가는 우리 형제를 반갑게 맞아준다.

코스모스 꽃길을 따라 작은 산모퉁이를 한 구비 돌아드니 윤기가 자르르 흐르는 흑진주 같은 알밤송이를 가지가 찢어질 정도로 주렁주렁 매달고 있는 밤나무에는 산들바람이 심술을 부리듯 가지를 마구 흔들어 성인이 된 자식이 부모의 곁을 떠나듯 알밤은 뚝뚝 눈물을 흘리며 미지의 서계로 새로운 삶을 찾아 머나먼 여행의 길을 떠난다.

또 한 모퉁이를 돌자 눈 가득 넓은 콩밭이 황금빛 산들바람에 콩 이파리를 나풀거린다. 나풀거리는 콩잎을 보고 있으려니 배곯던 어린 시절 콩서리 해먹던 일이 주마등처럼 스쳐간다.

지금은 콩 꼬투리나 꼬투리속의 콩알은 한 몸인 채로 누렇게 단풍이 든 황금빛 그늘 속에서 망중한을 즐기고 있지만 쥐구멍에 눈 뿌릴 동짓달에는 콩깍지로 콩을 삶아 메주 만들어 시렁에 매달릴 운명을 알고는 있는지?

콩밭을 지나자 갑자기 귀가 시끄러울 정도로 짹짹거리는 한 무리 참새 떼가 군무를 추듯 눈이 시리도록 파아란 가을하늘을 휘저으며 날더니 키가 허드레 장정같은 수수이삭 위로 내려앉아 아람이 벌 듯 토실토실 알차게 영글어가는 수수 알을 쪼아 먹느라 난리법석들을 떨어댄다.

“저런 고약한 참새드을 봤나” 뻐꾸기가 울어대는 봄부터 지금까지 농부들이 피땀 흘리며 가꿔놓았는데 수지를 도둑놈처럼 참새들이 먼저 먹다니...

저런 버르장머리 없는 참새들은 모두 잡아 고추장 발라 참나무 숯불에 구워 술안주를 해야 할 놈들 같으니라구...

척박한 땅에서도 잘 자라는 수수 지금은 옛날이야기가 되어버렸지만 내 가슴속에는 아직도 수수에 대한 향수가 알알이 남아 있다.
어린 날 생일 때는 쌀로 빚은 떡은 못 먹었어도 수수쌀로 만든 수수무생기만은 한해도 거르지 않고 년년이 먹었는데...
어디 수수무생기 뿐인가?

동지섣달 기나긴 밤 삭풍이 나뭇가지를 울릴때 온 가족이 화롯가에 도란도란 모여앉아 솥뚜껑 엎어놓고는 수수부꾸미를 구우면 구수한 냄새가 콧구멍을 들쑤셔놓아 없던 입맛도 되살아나게 하는데 늙은이 뱃가죽처럼 말랑말랑하게 잘 구워진 부꾸미를 하나 들고는 손이 뜨거워 입 바람으로 호호 불며 한입 베어 물던 부꾸미 속에 아무도 모르게 보물처럼 숨겨져 있는 팥고물이 부꾸미와 어울려 씹히는 맛은 말로는 표현할 수 없는 그야말로 별미 중 별미였는데...

부꾸미를 생각하노라니 입안가득 군침이 고인다.

이런 내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참새들은 곡마단의 곡예사처럼 산들바람에 일렁거리는 수수이삭을 떨어지는 놈 하나없이 넘나들며 배가 터지는 줄도 모르고 쪼아 먹는다.

참새가 미물이라고는 하지만 그동안 피땀 흘려가며 농사를 지은 농부를 생각하니 그냥 지나칠 수가 없어 운전대를 잡고 있는 동생에게 잠깐만 차를 세우라고 하려는 찰나 수수밭 위쪽에서 “위~잉” 하고 예초기 돌아가는 소리가 울려퍼지자 고요란 놈이 화들짝 놀라 꼬리를 말아쥐고는 훌쩍 깊은 산중으로 도망질을 치자 참새떼도 놀랐는지 기겁을 하고 짹짹 거리며 황금들판을 가로질러 건너편 숲속으로 꽁지가 빠져라 날아간다.
참새떼를 쫒고나니 앓던 이가 빠진 듯 속이 다 시원하다. “저 사람들은 첫새벽 왔나보죠?”
동생도 일등을 놓친 것이 아까운 듯 씁씁한 표정을 짓는다.

뉘집 자손인지는 몰라도 복받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또 한모퉁이을 돌어서자 예초기 소리는 모기소리처럼 들리는데 눈앞에는 넓은 들깨밭이 펼쳐진다.

아침 햇살을 머금은 노란 들깻잎은 산들바람에 금종이 같은 이파리를 나풀거리며 벌초는 다음날 하고 자기를 따서 깻잎 담그라고 유혹을 한다.

나 혼자 왔더라면 깻잎의 유혹에 넘어갔을지도 모르지만 동생과 같이 왔으니 어림 반푼어치도 없는 소리다.
수확을 며칠 앞둔 들깨를 바라보고 있노라니 갑자기 부침개 생각이 난다.

녹두 갈아 실파와 해물을 듬뿍 넣고 구은 빈대떡은 별미중에 별미로 추적추적 비내리는 날 부침개를 부치는 들기름 냄새는 미치도록 코를 괴롭혔는데...

들깨밭을 지나 산모퉁이를 돌아들자 드디어 선영이 눈속으로 들어온다. 선산이 황소가 누워있는 형국이라 와우혈이라고 하는 소리를 어렸을 때 할아버지한테 들은 기억이 난다.

선산 제일 꼭대기에는 10대조 양위분께서 잠들어 계신다.

10대조께서는 본디 한양에 사셨는데 조선조 선조때 역모에 연루돼 이곳으로 낙향해 용두산 동굴속에서 2년을 숨어 지내시다가 역모가 무고로 밝혀져 모든 관직도 버리시고 정착을 하셨다고 한다.

그러니까 우리 집안이 제천에 뿌리를 내린지도 어언 삼백년이나 되는 셈이다.

드디어 차가 선산 아래쪽에 멈춰섰다. 차에서 내리니 그윽한 국화향기가 물씬 묻어나는 신성한 공기가 앞가슴을 파고들어 가슴속까지 시원하고 향긋하게 느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