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마 탓인지 더위가 기승을 부리니 습기를 가득 머금은 후덥지근한 습한 공기는 구렁이가 먹이를 휘감듯 칭칭 몸에 감긴다.
이럴 때는 뼈가 시리도록 맑은 물이 흐르는 심산계곡을 찾아가 물속에 발을 담그고는 시원한 수박을 먹으면서 더위를 쫒는 데는 그만인 것을 ...
몸은 비록 점포 안에 있어도 지긋이 눈을 감고 있으려니 마음은 어느새 심산계곡으로 줄달음질을 치고 있다.
눈이 시리도록 짙푸른 숲에서는 매미가 울고 졸졸졸 바위사이를 굽이굽이 휘돌아 흐르는 물소리를 들으면서 시원한 나무그늘에 누워 있으면 세상 부러울 것 하나 없이 신선이 된 듯 한 느낌이 들 거라 생각을 하고 있는데 “때르르릉! 때르르릉‘ 전화벨이 산통을 다 깬다.
옛 말에 도와주지는 못할망정 제상다리는 들지 말랬다고 하필 이럴때 전화가 올게 뭐람...
구시렁거리면서 수화기를 들었다.
“여보세요? 말씀 좀 여쭙겠습니다.” “무슨 말씀이신지 해보세요.” “하도 오래 된 일이라 기억을 하실 런지 모르겠습니다” “ 무얼 말씀이세요?‘ ”저~ 군대는 다녀오셨지요?“ ”네! 갔다 왔습니다.“ ”혹시 국군의무사령부에서 근무하지 않으셨어요?“ ”네 그곳에서 근무했습니다.“ ”그럼 혹시 송병장님 아니세요?“ 근무처와 계급까지 아는것을 보니 아를 알기는 아는 사람이 분명하다.
“그런데요.” “송병장님 맞으시군요! 참말로 반갑습니다. 진작에 찾아뵙고 인사를 드렸어야 하는데 목구멍이 포도청이라 차일피일 미루다 보니 오늘에서야 전화를 드리게 돼서 너무 죄송합니다.”
이 무슨 귀신 씨나락 까먹는 소린인가! 사십년이 다 되어가는 옛 일인데 이제 와서 전화를 하다니 순간 옛 군대생활이 주마등처럼 뇌리를 스쳐간다.
“실례지만 전화하시는 분은 어디 사시는 누구시죠?” “저는 단양에 살고 있는 김덕배라고 합니다.” “김덕배?” 덕배라는 이름을 입속에 밀어넣고는 되뇌어 보지만 전혀 기억이 나질 않는다. “저를 어떻게 아시죠?” “저는 그때 국군간호학교에 근무했었습니다.” “국군간호학교에 근무를 하셨다구요?” 지금이야 다른 곳으로 옮겼겠지만 그때는 국군의무사령부 예하부대였으니까 잘못 걸려온 전화는 아닌 것 같다.
“송병장님 덕분에 군 생활 6개월만에 제대를 시켜주셨잖아요” “나 때문에 6개월만에 제대를 하셨다구요?” “그때 송병장님이 사령부 인사처에 근무하지 않으셨다면 누가 저한테 그런 정보를 주셨겠어요.”
그 말을 듣고 나니 어렴풋이 옛 일이 떠오른다.
1970년 11월인가 초등학교 줄업자는 곧 바로 전역시키라는 공문이 국방부에서 내려온 것이 생각 난다.
내가 인사처 사병계를 볼 때 단양이 고향이라면서 논산훈련소에서 6주간 훈련을 마치고 꺼벙하게 생긴 친구가 국군의무사령부로 전입을 왔다.
객지에서는 고향 까마귀만 봐도 반갑다는데 군에서 고향사람을 만났으니 무척 반가웠다.
그래서 근무하기 편하다는 국군간호학교로 보내 주었고 그 공문을 보고는 그 친구를 불러서 학벌을 물어보니 초등학교만 나왔다기에 곧바로 상신해서 제대를 시켜 준 일이 있긴 있었다. 그러나 40년 전 일이라 이름은 전혀 기억이 나질 않는다.
“송병장님! 송병장님은 저한테는 은인이신데 오늘 좀 만나 뵐 수 있을까요?” “제가 뭐 한일이 있다고 그런 과분한 말씀을 하세요.” “아닙니다. 그 때 송병장님이 그 자리에 안 계셨다면 꿈도 못 꿀 일이었어요.” “아니예요 누가 그 자리에 있었어도 마찬가지 였을 겁니다.” “송병장님 만나 뵙고 싶습니다.” “그럽시다 나도 보고 싶네요” “사업이 바쁘시겠지만 지금 단양으로 내려오실 수 있으세요?” “이렇게 서로 알았으니 살다보면 만날 날이 있겠지요.” “지금 바쁘신가 보군요?” “바쁘지는 않습니다만.” “그러면 제가 모시러 갈까요?” “그러실 필요 없구요. 제가 가겠습니다.” “고맙습니다 송병장님.” “고맙긴요. 오히려 옛 일을 지금까지 기억해 주시고 찾아주시니 제가 더 고맙지요.”
“차는 가지고 오지 마시고 시내버스를  타고 오세요. 제가 버스터미널로 마중을 나가겠습니다.” “알았습니다. 그러면 단양에서 뵙겠습니다.” “송병장님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전화가 끊어졌다. 꿈을 꾼 것 같다. 사십년 가까이 된 일인데 이제서 연락을 해오다니... 나도 모르게 입이 터진 팥자루처럼 벌어진다.
점포를 나서 단양행 시내버스에 몸을 실었다. 날씨가 더워서 그런지 대절한 듯 손님이 별로 없다. 버스는 금새 시내를 빠져나와 단양을 향해 신바람 나게 달려간다.
벼들은 벌써 개꼬리 같은 이삭을 뽑아 올리고 있고 길옆 수수도 이삭이 패고 과수원의 사과도 어린아이 주먹만큼 굵어있다.
풍성한 들녘을 내다보니 농부들의 노고에 저절로 고개가 숙여진다. “김덕배?”
되뇌어 보니 한동안 잊고 살았던 군대생활이 물안개처럼 피어오른다.
김덕배 그 친구가 제대를 할 무렵인가? 국군군의학교와 국군대구통합병원은 사무실에 스팀시설이 갖추어져 겨울이면 따뜻하게 지내는데 국군의무사령부만은 연탄을 피워 난방을 해결해야 하기에 겨울만 돌아오면 사령부 사병들은 고생이 이만 저만 아니다.
혹시라도 연탄불을 꺼트리기라도 하는  에는 고참들이 매타작을 하기에 곡소리가 나는 날이다.
마침 그날은 인사과 선임병이 제대를 하는 날이라 근무를 마치고는 대구시내로 나가 회식을 하고 돌아와 잠자리에 누웠건만 연탄불 걱정에 잠이 오지를 않는다.
화들짝 일어나 사무실로 달려가 보니 불이 좋기는 한데 아침까지 갈 것 같지는 않아서 연탄을 갈고는 밑불이 살아있는 연탄을 쓰레기장에 버린다는 것이 재수 없게도 철조망 밖으로 던지는 바람에 바싹 마른 잡풀에 불이 붙어 훨훨 타오르는 것이 아닌가!

만약 일찍 사령실에서 알기라도 하는 날에는 곧바로 영창을 가야한다.
큰 일이 나도 보통 큰일이 아니다.
초기에 진화를 못하면 곧 바로 죽음 뿐이다. 눈은 뒤집히고 가슴은 터질 듯 후당당 거리며 마구 뛰고 미칠것만 같다.
어디서 그런 힘이 나오는지 비호처럼 철조망을 넘어 군복을 벗어 미친 듯 불을 꺼 보지만 혼자서는 역부족이다. 때마침 행인 두 사람이 지나간다. “죄송하지만 불좀 같이 꺼주세요!”
다급하게 고함을 지르자 행인도 위험을 느꼈는지 윗옷을 벗어들고는 함께 불을 끈다고 돕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