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서가 지났으니 여름도 벌써 막판으로 치닫고 있다.
절기상 다음이 입추이니 가을이 코앞까지 다가와 있다는 것 아닌가?
지금이야 가마솥 불볕더위가 기승을 부려대는 바람에 입맛을 잃고 비지땀을 흘리면서 숨은 턱에 차고 찾느니 냉수이긴 하지만 머지않아 입추가 돌아오면 벼들은 개 꼬리 같은 이삭을 내밀고는 산에서 불어오는 산들바람을 타고는 춤추는 듯 하늘거릴 것이고
섬돌 밑에 귀뚜라미는 애간장을 녹일 듯 애절하게 울어대고 눈이 시리도록 짙푸른 나뭇잎들도 산불이라도 난 듯 붉게 단풍이 들어 우리 눈을 황홀지경으로 몰아넣는 천고마비의 계절이 돌아오겠지.
며칠 전만 해도 새벽 다섯 시만 되면 어서 일어나 아침운동 나가라고 어김없이 울어주던 뻐꾸기도 가을이 온 줄을 어떻게 알았는지 개개비 둥지에서 자란 새끼들을 데리고 따뜻한 남쪽 나라로 떠났는지 울음소리도 멎었다.
가을!
또 한해가 익어가는구나!
생각만 해도 가슴이 알싸해져 온다.
오곡이 익어가듯 나도 알차게 영글어야 할 텐데 왠지 쭉정벼처럼 익어가는 느낌이 드니 어찌하면 좋단 말인가?
아무도 봐주지 않는 한적한 들녘 외진 모퉁이에는 어느새 코스모스가 흐드러지게 피어나 청초한 자태를 뽐내고 있고 겨울을 코앞에 둔 꿀벌들은 꽃 속에 머리를 쑤셔 박고는  꿀을 따느라 여념이 없다.
꿀벌을 보고 있으려니 내 삶도 저 꿀벌 같다는 생각이 들면서 왠지 마음조차 초조해 지는 것은 무슨 연유인가?
이 꽃에서 저 꽃으로 문안인사를 하듯 어느 꽃송이 하나 빼놓지 않고 꿀을 따는 꿀벌들을 보고 있으려니 갑자기 어린시절 목청을 따던일이 생각난다.

해질녘 범식이가 지개에 바소쿠리 달아 지고는 소풀을 베러가자고 한다. 범식이를 따라 나섰다.
그런데 그날따라 가까운 들로 가는 것이 아니라 마을에서 멀리 떨어져 있는 높은 산으로 올라간다.
“야! 어디로 가냐?” “잔말 말고 따라오기나 해라.”
하긴 집집이 소를 키우는 지라 가까운 곳에는 소풀이 바닥을 드러낸 지 이미 오래다. 산 능선을 두어 봉 넘으니 소가 좋아하는 풀들이 지천으로 널려있다.
길섶으로는 칡들도 보랏빛 꽃을 흐드러지게 피워 정신을 어질어 트릴 정도로 그윽한 향기를 뿜어내고 벌들도 꿀을 따느라 웅웅거리면서 난리법석을 떨고 있다.
그런데도 범식이는 소풀 벨 생각은 않고 자꾸만 산으로 올라간다. “어디까지 갈꺼냐?” “조금만 더 가면 안달미군락지(소가 좋아하는 풀의 이름)가 있다.
이 풀은 소가 제일로 좋아하는 풀이다. 이왕이면 다홍치마라고 멀리까지 왔으니 좋은풀을 베어가지고 가야겠다는 생각에 가는데 까지 가 보기로 마음먹었다.
산을 오를수록 시원한 바람이 땀을 씻어주어 기분이 상쾌해 진다.
한참을 더 산을 오르자 범식이 말대로 안달미군락지가 눈앞에 펼쳐진다. 안달미를 보는 순간 나도 모르게 탄성이 저절로 터져 나왔다.
“야! 이런 곳이 다 있었냐?” “여긴 아무도 몰라.” 범식이는 금광이라도 발견한 듯 우쭐거린다. 지개를 벗어 놓은 범식이가 비단결 같은 안달미를 베기 시작한다. 소풀 한 짐 베기는 그야말로 식은 죽 먹기다. “야! 우리 내일 또 오자.” “다른 놈들한테 이야기 하지 마라.” 욕심이 놀부 같은 놈이라 본색을 드러낸다.
낫질이 서툰 나는 이제 겨우 반 짐도 안 되게 베었는데 범식이는 벌써 태산같이 한 짐을 베어 놓고는 “야! 그만 가자.” 하나를 보면 열을 안다고 범식이는 농사일도 잘하지만 낫질은 따라갈 사람이 없다.
“그래가지고 밥 먹고 살겠냐?” “밥 못 먹으면 죽 먹고 살지.” “그자식 일은 못하는 놈이 말은 잘한다니까.” 지개에 꽃아 놓은 낫을 뽑아 들더니 풀을 베는데 혀글 내 두를 정도로 참으로 낫질을 잘한다. 잠깐 사이 내 지게에도 풀짐이 태산같다.
풀짐위로 지개꼬리를 매던 범식이가 무었을 봤는지 풀짐옆에 아람드리 소나무를 뚫어져라 쳐다본다.
“야! 왜 그래?” 묻는 말에는 대답을 않고 마치 귀신에게 홀린 듯 소나무쪽으로 걸어간다.
“저 자식이 미쳤나 왜 저러지?” 소나무 밑으로 간 범식이가 소나무에서 눈을 떼지 않고 뭔가를 발견한 듯 소나무 아래 위를 찬찬히 살핀다.
“야! 도대체 뭣을 봤기에 그러냐?” “야! 우리 땡 잡았다.” “땡 잡다니 그게 무슨 소리냐?”
“목청을 발견했다 이 말이다.” “목청이 뭔데?” “넌 아직 목청도 모르냐?” “소나무속에 벌집이 있단 말이다.” “뭐! 소나무 속에 벌집이 있다고?” “그렇다니까.” “야! 벌집 건드리지 마라 잘못하다간 집에도 못간다.” “목청이 얼마나 좋은지 너 알기나 하고 그런 말을 하냐?” “목청이고 나발이고 난 벌 소리만 들어도 싫으니 나 먼저 간 다음에 벌집을 건드려도 건드려라.”
“사내 자식이 벌이 뭐가 무섭다고 그렇게 벌벌거리고 떠냐?” “천금을 준다해도 나는 벌은 싫다.” “지금은 벌들이 활동을 하니 안되고 이따가 밤에 다시 오자.” “뭐라고! 밤에 다시 오자고? 미쳤냐 밤에 여길 다시오게? 오고 싶으면 너나 오던가 말던가 나는 죽으면 죽었지 안 온다.” “너는 옆에서 불이나 밝히면 된다.” “글세 싫다니까 왜 자꾸 헛소리를 하냐?” “그자식 의리라고는 파리 뭐만큼도 없는 놈이네 니가 안오면 나혼자 오란 말이냐?” “해 넘어간다 빨리 집에나 가자.”
안달미를 하짐 지고는 집으로 돌아와 저녁을 먹고 잠자리에 누웠는데 범식이가 상길이를 데리고 나를 찾아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