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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난아, 주모가 기다릴 텐데? 빨리 가야하잖니?”
“딱 한 잔만 마시고 가요.”
“그래, 그럼 딱 한잔이야.”
“네에. 고마워요.” 박달 도령은 한 잔 술을 마시면서 간난이에게 자신의 간단한 신상을 소개하였고 간난이는 그런 박달 도령이 측은해 앞으로 박달 도령을 도와주겠다고 하였다.
“간난아, 고맙다.”
“대신 박도령님, 좋은 일이 있으면 저에게 술 한 잔 사주셔야 해요? 오늘은 제가 살게요.”
“고, 고맙구나.” 박달 도령과 간난이는 모주 두 잔씩 마시고 주막으로 향하였다. 하늘이 꾸물거리더니 함박눈이 내리기 시작했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고 지극히 평범한 날이 며칠 흘렀다. 박달 도령은 이제 어느 정도 주막일이 손에 익었지만 점점 초조했다. 먹고 자는 것에 너무 많은 시간을 빼앗기고 있어 박달은 초조해 지기 시작했다.
“그런 분, 이 주막에 묵은 적이 없다고요?”
“그렇다니까요? 낭군께서 다른 데로 가기 전에 어서 다른 주막을 뒤져봐요. 원 저런. 쯧쯧쯧......”
“고맙습니다.” 아지는 아침부터 마포와 서강(西江) 일대의 주막을 뒤지며 박달 도령을 찾았지만 어디에도 없었다. 벌써 여러 날이 지났지만 박달 도령이 괴나리봇짐도 찾으러 오지 않자 아지는 점차 불안해했다. 비록 과거에 입격하지 못해 순간적으로 흥분해 박달 도령을 구박하였지만 한편으로 생각하니 이 엄동설한에 한양에 일가친척 한 명 없는 박달 도령에게 너무 야박하게 한 것에 깊이 후회하고 있었다.
아지는 아현과 운종가, 구파발, 노량진, 용산, 이문, 세검정, 흥인지문(興仁之門) 근처의 이현(李峴)시장 등 주막집이 집중 몰려있는 장소를 샅샅이 뒤지고 다녔지만 박달 도령을 쉽게 발견할 수 없었다.
아지는 박달 도령이 정말로 자신의 박대에 분노해 고향으로 돌아간 게 아닌가 하는 의구심이 들기도 하였지만 괴나리봇짐이 그대로 있는 것에 안심하며 분명히 한양 어디인가에 머물고 있을 거라고 판단하였다.
‘정말로 나의 행동에 마음을 돌린 걸까? 아니야, 그렇게 쉽게 발길을 돌린 분이 아니야. 아마도 나에게 미련이 있으면서도 자존심 때문에 잠시 머뭇거리고 있을 거야. 그렇다면 박달 서방님의 마음을 편하게 해주고 자존심을 살려주면서 다시 마음을 돌리게 해야 해. 이대로 포기할 수 없어.’ 눈이 녹아 한양의 대로는 질척거렸다. 아지는 마차를 한대 임대 내 하루 종일 한양 거리를 돌아다녀 보았지만 헛수고 였다. 이번에는 마지막으로 칠패시장 주변 주막을 뒤져보기로 하였다.
아지는 마차에서 내려 마부와 걷기로 하였다. 먼저 숭례문주변을 둘러보았다. 눈이 내리는 데도 불구하고 많은 한양의 백성들이 바삐 숭례문을 드나들었다. 눈 덮인 숭례문 지붕에 일렬로 늘어선 어처구니들이 춥다고 소리 지르는 것 같았다. 녹색 붉은 색의 숭례문 단청이 세월의 무게를 말해주는 듯 고색창연하면서도 위엄이 느껴졌다.
숭례문 아래 좌우로 벙거지를 쓰고 검정색 옷을 입은 병사 두 명이 시커먼 벙어리장갑을 끼고 삼지창을 들고 서 있었다. 그들은 지나가는 사람들 중에 이상하다고 판단되는 행인을 세워놓고 그들의 소지품을 일일이 검사하며 범인의 얼굴이 그려진 그림과 대조하기도 하였다. 푸른색 철릭을 입고 전립(戰笠)을 쓴 사령인 듯 한 자가 칼눈으로 행인들의 동태를 살피고 있었다.
아지는 칠패시장에 있는 주막 서너 곳을 뒤져보고 주모에게 물어 보아도 박달 도령과 비슷한 인상을 한 남자를 보았다는 사람은 한명도 없었다. 혹시나 싶어 시장을 돌아다니면서 박달 도령과 키와 인상이 비슷한 사람을 찾았지만 훤칠한 박달 도령과 비슷한 사내는 없었다.
“저기여, 이 칠패시장통 말고 다른 데 주막이 또 있나요?”
“저기 시장 끝에서 목멱산 쪽으로 조금만 가면 주막이 있을 거요. 왜요? 우리 집 국밥도 맛있는데 들고 가시지요?” 주모는 좀 전에 들렸던 주막에 다시 들려 묻자 주모는 시큰둥한 표정으로 마지못해 대답했다. 아지와 마부가 주모가 알려준 대로 한참 걷자 허술한 주막이 하나 나타났다. 마침 시장기를 느낀 아지와 마부는 마당에 있는 평상에 앉아 국밥을 시켰다. 마당에 쳐 놓은 포장에 눈이 쌓인 것을 간난이 바지랑대로 툭툭 치며 눈을 털어 냈다.
“저어, 아가씨, 뭣 좀 물어 볼게요.” 아지가 간난이를 부르자 간난이 아지에게 쪼르르 달려왔다.
“뭔데요?”
“혹시 이 주막에 박달이라는 이름을 가진 도령이 기거하고 있지 않나요? 아니면 하룻밤 정도 묵어갔던지.” 아지가 박달 도령이의 형상을 그린 종이를 간난이에게 보여 주었다.
‘앗, 바, 박도령님 얼굴이.’ 간난이는 아지가 박달의 아내나 혹은 일가친척이 아닌가 싶어 ‘그 분은 이 주막에서 먹고 자면서 일하고 있어요.’라는 말이 나오려는 것을 간신히 참았다. 한편으로는 가족이 아닐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아가씨, 이런 남자 분 못 봤어요?”
‘어쩌나, 박달 도령님이 물을 길러 가셨는데 금방 올 텐데......’
“네에, 못 봤는데요.” 간난이 두근거리는 가슴으로 눈을 내리깔며 짧게 대답하였다. 아지가 막 국밥을 먹으려고 수저를 들었을 때 박달 도령이 물통에 가득 물을 채워 지게를 지고 마당으로 들어서다가 아지와 시선이 마주쳤다.
“서, 서방님.”
‘아니, 아지가 여길 어떻게?’
“서방님, 이게 어찌된 거예요?” 아지가 평상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러는 그대는 여기 어쩐 일이오?”
“서방님, 제가 잘못했어요. 흑 -” 아지가 박달 도령 앞에 서더니 반쯤 허리를 숙였다. 오랜만에 보는 임이었다. 아지는 자신도 모르게 눈물을 찔끔 흘렸다.
“나는 그대를 더 이상 보고 싶지 않소. 그러니 돌아가오. 난, 이 주막에서 새벽같이 일어나 하루 종일 물 긷고 가마솥에 불 지피고 손님들에게 국밥 나르고 술 나르며 하루하루 살아가고 있소. 마음 하나는 참으로 편합디다. 그대가 나를 다시 찾을 줄은 몰랐소.” 박달 도령은 과거에 불합격하여 운종가에서 아지로부터 박대를 당했던 일을 생각하면 화가 치밀었다. 그러나 무슨 일로 자신을 찾아 왔는지 한편으론 궁금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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