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렁이 알 같은 수표를 여지껏 발 꼬랑내를 맡으며 숨도 못 쉬게 신발 밑바닥에 깔려 있었으니 오죽이나 답답했겠는가 싶어 얼른 꺼내 보니 이 무슨 마른 하늘에 날벼락을 쳐도 유분수지 이 무슨 황당무계한  일이 있을 수 있다는 말인가?”

가슴이 설레인다.
도대체 얼마나 잘 생겼길래 여섯명이 하나같이 말도 제대로 못해보고 일언지하에 딱지를 맞았단 말인가?
미쓰리를 만나면 무슨 말을 어떻게 해야 하지? 머릿속이 하얘지는 느낌이 든다.
드디어 내가 탄 열차는 서울역에 도착해서 용감한 군인처럼 보무도 당당히 걸어 삼각지로 가는 버스에 올랐다.
열차를 타고 올때만 해도 조용하던 가슴이 버스를 타고 나니 가슴이 터질듯한 느낌이 들면서 후당당거리고 마구 뛴다.
버스가 빌딩숲속을 마구 달린다.
출장을 올 때마다 느끼는 일이지만 고층빌딩을 보고 고향의 오두막집을 떠올려보면 내가 자꾸만 작아지는 느낌이 들어서 되도록 빌딩을 쳐다보지 않으려고 자는 척 눈을 감고는 했는데 그 날도 버스를 타자마자 자는 척 눈을 감고 있으려니 삼각지라는 버스 안내양의 목소리에 화들짝 눈을 뜨고는 내렸다.
국방부 위병소에 출장증을 맡기고는 7층에 있는 의무국 의정과 출입문 앞까지 왔다. 가슴이 후당당 거리며 마두 두 방망이질을 해 댄다.
출입문 옆에 정숙이라고 쓰여 있는 거울을 보니 복장은 말끔하다. 크게 심호흡을 한번 하고는 노크를 하자 “네! 들어오세요.”
은쟁반에 옥을 굴리는 듯한 미쓰리의 목소리가 모기소리처럼 문틈을 빠져 나온다.
모자를 벗어 겨드랑이에 끼고는 사무실 안으로 들어서니 사무실에 근무하는 요원은 남자 넷에 여자가 셋인데 모두 일들이 바쁜지 내게는 눈길도 한번 주질 않고 일만 한다.

힐끗 차창 밖을 내다보니 열차는 어느새 영천을 지나 남쪽을 향해 싱그러운 봄바람을 가르며 힘차게 달려가고 있고 들녘의 보리는 꿩이나 종달새가 둥지를 틀어도 될 만큼 한 뼘씩 자라나 춤을 추듯 봄바람에 일렁거리고 있고 매화와 개나리는 어느새 꽃이 지려는지 봄바람에 한잎 두잎 꽃잎을 날리고 진달래와 벚꽃은 산불이라도 난 듯 흐드러지게 피었다.

곽 중령님 앞으로 다가가 “충성!” 거수경례를 하자 그제서야 일손을 놓고는 안경너머로 나를 넌지시 바라보며 “국군의무사령부에서 왔는가?” “네! 그렇습니다.” “서류는?” “여기 있습니다.”
가지고 간 서류를 내밀자 서류를 받아들고는 잠시 훑어보시더니 만족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며 “먼 길 오느라 수고했네. 이리로 앉게.”
말소리는 위엄이 있고 날카롭지만 나를 바라보는 눈빛 속에는 인자함이 묻어난다.
의자에 앉아 여자 셋을 훑어보니 다들 사복차림을 하고 있어 누가 미쓰리인지 알 수가 없어 두 귀를 쫑긋 세우고는 말소리가 들려오기만을 기다리고 있는데 “미쓰리! 여기 차 두 잔만 줘.” “예! 알았습니다.”
목소리의 주인공은 건너편 자리에서 뭔가 서류를 책상 가득 펼쳐놓고는 열심히 일을 하고 있는 여인이다.
여인의 얼굴을 보는 순간 두근거리던 가슴은 떡심 풀리듯 가라앉고 행여 사귀자고 할까봐 겁이 나서 뜨거운 커피를 물마시듯 마시고는 서둘러 국방부를 빠져 나왔다.
미쓰리의 얼굴을 지우려고 해도 자꾸만 떠오른다.
거무티티한 얼굴에 여드름은 왜 또 그렇게나 많이 났는지 꼭 옴 오른 두꺼비 같은데다 눈은 쪽 째져서 독사눈 같고 코는 들창코에다 입은 하마처럼 커서 쩍 벌리면 주먹 하나는 들어가고도 남을 것만 같다.
눈을 씻고 찾아봐도 예쁜 구석이라고는 단 한곳도 없는데 어쩌면 그리도 은쟁반에 옥을 굴리는 듯 목소리만은 천사 같은지...

옛 군대생활을 더듬다 보니 열차는 어느새 부산역에 도착을 해서 마라톤을 완주한 선수처럼 가쁜 숨을 헐떡거리면서도 무사히 손님들을 목적지까지 모시고 왔다는 자부심에 흐믓한 표정을 짓고 있다.
역사 위로 올라서니 눈이 화등잔같이 커진다. 역사가 어찌나 웅장하면서도 멋스럽고 깨끗한지 털어도 띠끌 하나 나오지 않을 듯하다.
출입문을 나서니 성벽처럼 높은 곳에 에스컬레이터가 높이 있어 오르고 내려오는 데도 신선놀음 하듯 즐겁기만 하다.
시간을 보니 11시 반이 지나가고 있다.
부산 지리를 모르니 내가 예식장을 찾기는 힘들 것이고 힘 안들이고 쉽게 찾기 위해서는 택시를 타는 것이 상책일 것 같아 택시를 잡고는 청첩장을 내미니 예식장을 잘 알고 있다면서 어서 타란다.
택시를 타고는 발가락을 꼼지락 거려보니 뭔가 도톰한 게 밟히는 느낌이 전해져 온다.
뭘까? 생각하면서 구두를 벗는데 그제야 구두밑창 밑에 숨겨둔 수표가 생각이 난다.
구렁이 알 같은 수표를 여지껏 발 꼬랑내를 맡으며 숨도 못 쉬게 신발 밑바닥에 깔려 있었으니 오죽이나 답답했겠는가 싶어 얼른 꺼내 보니 이 무슨 마른 하늘에 날벼락을 쳐도 유분수지 이 무슨 황당무계한  일이 있을 수 있다는 말인가?
신발 밑창에서 꺼낸 것은 수표가 아니라 수표처럼 접어놓은 종이쪽지가 아닌가?
이것이 도대체 어떻게 된 일인가 궁굼해서 쪽지를 펼쳐보니 깨알 같은 아내의 글씨가 눈으로 들어온다.
“여보! 고마워요. 잘 쓸게요. 다음부터는 내가 찾지 못하는 곳에 잘 숨겨 놓으세요. 하긴 당신이 어느 곳에 숨긴들 부처님 손바닥 안인 것을... 수표 잃어버렸다고 마음 상해 하지 말고 잘 다녀오세요.”
정말 미치고 팔딱 뛸 노릇이다.
어떻게 신발 밑창까지 뒤져볼 생각을 했단 말인가?
모처럼 부산까지 왔으니 자갈치시장 들러서 맛있는 회에다 소주 한잔 곁드리려고 마음을 먹었는데 수표를 몽땅 도둑을 맞았으니 말짱 도루묵이다.
아내가 준 돈으로는 축의금 내고 왕복경비 쓰고 나면 회는 커녕 자장면 한그릇 사먹으면 딱 맞을 것 같다.
시가지를 달리던 택시가 갈매기가 날고 컨테이너 박스가 산더미 처럼 쌓여있고 푸른 파도가 넘실 거리고  산 같은 배가 오고가는 해안길로 들어선다.
“아직 멀었습니까?” “조금만 더 가면 됩니다.”
꿈에 떡맛보듯 보는 바다! 넓고도 넓은 바다를 내다보고 있노라니 아내에게 도둑맞은 수표 생각은 눈 녹듯 사라지고 잠시 후면 만나게 될 길상이를 알아볼 수나 있을런지 마음이 들뜬다. 그도 나처럼 세파에 찌들어 많이 변했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