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부노릇을 하는 범수가 연기에 눈물을 찔끔거리며 막대기로 밀이삭을 뒤적이며 굽더니 밀이 다 익었는지 불을 발로 짓밟아 끄고는 윗옷을 벗어 부채삼아 휘두르니 잿티는 몽땅 날아가고 먹음직스럽게 밀이삭만 남는다.
새까많게 탄 밀이삭을 하나 주워 손바닥에 올려놓고는 맺돌 돌리듯 싹싹 비비니 누런 밀알이 톡톡 튀어나온다.
입바람으로 후! 불으니 밀껍질은 몽땅 날아가고 밀알만 소복하게 남는다.
한알의 밀알이라도 흘린세라 입을 찢어져라 벌리고는 툭 털어넣고 와작와작 씹으니 눈알이 튀어나올 만큼 맛이 끝내준다.
얼마나 맛이 있었으면 범수는 멀써 두 이삭을 비벼 입속에 털어넣고는 또다시 손바닥에서 불이 날 정도로 밀이삭을 비벼대는데 얼굴은 검정이 묻어 꼬약쥐 같고 버찌물이 묻은 주둥아리는 개똥구멍 처럼 새까많다. 늘 입을 열어 놓고 있는 명철이도 밀서리맛에 빠져 숨도 크게 안쉬고 손바닥방아만 열심히 돌리고 있다.
셋이 먹다가 한사람이 죽어도 모를 꿀맛같은 밀서리를 정신도 없이 까먹고 있는데 내 앞에 앉아서 걸신들린 듯 밀서리를 먹고 있던 명철이가 밀서리를 씹다말고는 놀란 토끼눈을 해 가지고는 저길 보라며 손가락질을 한다.
무슨 일 때문에 저렇게 호들갑을 떠나 싶어 뒤를 돌아보니 명철이가 놀라 호들갑을 떨만 했다. 벚나무골 아래쪽 마을에서 호랑이 할아버지로 통하는 철묵이 아버지가 지게를 지고 올라오시는 것이 아닌가!
더구나 우리가 먹고 있는 밀도 철묵이네 밀이니 만에 하나 붙잡히기라도 하는 날엔 몇날며칠을 철묵이 아버지를 찾아뵙고는 용서를 해 주실 때까지 손이 발이 되도록 빌어야 하는 곤욕을 치러야 한다.
철묵이 아버지가 얼마나 지독한지는 그 어른 일생을 들어보면 알 수가 있다.
이 이야기는 철묵이 아버님한테 내가 직접들은 이야기인데 철묵이 아버지는 1910년에 태어나셨으니 지금껏 살아 계셨다면 아마도 올해가 백살이 되는 해 이다.
철묵이 아버지가 스물다섯 되시던 해 일본놈들에게 징용을 당해 일본으로 끌려가 화약 공장에서 강제노역을 일본이 패망할 때까지 하시다가 해방이 된 다음해 봄 고향으로 돌아오셨는데 그때 밴 습관을 지금까지도 지키고 계신다.
화약공장에서 노역을 하셨기에 낮에는 절대로 담배를 피우지 못하게 해서 밤이 돼 숙소에 돌아와서야 담배를 피우셨다고 한다.
그런데 해방이 된지 20년이 지난 지금도 그때 습관을 버리지 않고 낮에 일을 할 때는 담배를 절대로 피우시질 않고 해만 지면 날이 밝을 때까지 줄담배를 피운다고 하신다.
어디 그뿐인가? 자식들 한테도 일을 시켰는데 일을 안하고 놀면 그날은 굶긴다고 하신다. 그렇게 지독하신 호랑이 같은 무서운 어른이신데 허락도 없이 밀을 한 아름이나 뽑아왔으니 큰일이 나도 보통 큰 일이 아니다.
범수는 철묵이 아버지를 보더니 밀서리고 나발이고 모두 다 내팽개치고는 벚나무골로 삼십육계 도망질을 친다. “야 임마! 같이 가” 명철이도 자리를 박차고 범수 뒤를 쫒아가려는 것을 허리춤을 나꿔채자 명철이가 화를 내며 “야! 왜 붙들어? 너는 철묵이 어버지가 무섭지도 않냐?” “무섭지” “무섭다는 놈이 왜 붙잡어?” “아무리 무서워도 불은 끄고 가야지” “무슨 불?” “너는 바닥에 불덩어리가 안 보이냐?” 봄불은 여우불이라고 만에 하나 회오리바람이라도 불어 철묵이네 밀밭에 불이라도 난다면 우리는 콩밥먹으러 가야한단 말이야“ ”니 말은 맞는데 물이 있어야 불을 끄지“ ”물은 있잖어“ ”개울이 없는데 물이 어디 있다는 거냐?“ ”여기 있잖아“
얼른 바지춤을 내리고는 거시기를 꺼내 소방호수처럼 바닥의 불을 끄자 명철이도 빙그레 웃으며 바지춤을 내리고 불을 끄는데 호스가 놀라서 막혔는지 물줄기가 찔끔거린다.
바닥의 불을 대충 끄고는 바지춤을 여미며 아래를 쳐다보니 철묵이 아버지는 아직도 우리를 못 보셨는지 구부렁거리고 올라오신다.
명철이와 나는 불맞은 멧돼지처럼 뛰어 벚나무골로 숨어들자 혼자만 살겠다고 먼저 도망친 놈이 뭘 잘했다고 우리를 보고 역정을 낸다. “야 이 썩을 놈들아! 밀서리에다 오줌을 갈기면 다시는 못 먹잖아” “불 안꺼서 밀밭에 불나면 니가 책임질꺼냐?” “불이 왜 나?” 그때 마침 한무리 회오리바람이 불어와 시꺼먼 잿티를 돌기둥처럼 돌돌말아 하늘높이 올라가더니 철묵이네 밀밭에 흩뿌려 놓고는 앞산을 넘어간다. “야 임마! 저래도 우리가 잘못한 거냐?”
범수는 그래도 밀서리가 아까운지 입맛을 다시며 풀죽은 놈처럼 고개를 떨군다. 드디어 철묵이 아버지께서 밀서리한 자리까지 오시더니 오장육보가 뒤집어지시는지 지고 있던 지게를 훌러덩 벗어놓으시고는 밀서리한 사람을 찾느라 주위를 두리번두리번 거려도 사람이 보이질 않자
“여런 나쁜놈들 남의 곡식을 주인 허락도 없이 밀서리를 해 쳐먹다니.... 어떤 시러배 잡놈인지 잡히기만 잡히면 모가지를 똑 꺾어 놓을 테니까”
난생 처음 들어보는 욕설에 모골이 송연해 진다. 철묵이 아버지 말대로 붙들리기라도 하는 날에는 다리몽뎅이 하나는 부러질 각오를 해야 한다.
“야! 저길 봐라. 우리가 오줌 싼 밀서리를 철묵이 아버지가 먹는다.” 명철이가 벚나무에 기대어 서서는 키득키득 웃어댄다. 명철이 말을 듣고 내려다 보니 해괴한 욕바가지를 쏟아놓으시던 철묵이 아버지가 우리가 먹던 그 자리에 퍼지르고 앉아 밀이삭을 열심히 비벼서 입속으로 털어 넣는다.
“야! 지린내 안 날까?” 범수도 우스운지 낄낄거리며 씨부렁 거린다. 어쩌면 오줌이 간이 돼서 우리가 먹을 때보다 더 맛이 있을지도 모를 일이다.
그날 밀서리는 참으로 맛이 있었는데...
구수한 밀서리 생각에 입안 가득 군침이 고인다. 지금도 밀서리 맛이 옛날 그 맛일까?
밀서리 생각에 옛고향을 찾아가 보았건만 눈을 씻고 찾아봐도 밀밭은 보이질 않고 보이는 것이라곤 고추, 옥수수, 고구마, 콩, 수박, 물오이 잎만 춤추듯 훈풍에 하늘 거린다. 고향을 떠나온지 반세기 격세지감만이 느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