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맘때쯤이면 유난히 생각나는 새내기 공무원 시절이 새삼 그리워진다.

28년 전 3월 초 인 것 같다. 산골의 겨울은 길었다. 아직 산과 산길 음지 저쪽으로 희끗 희끗 잔설이 남아 있다.

내일은 반상회 날이라 오전에 면장님 주제 하에 마을 담당 직원들 교육이 있은 후 계별로 협조사항이 한 뭉치씩 주어졌다.

새마을 사업 예정지 조사 , 새마을 소득조사, 농경지 별 작목반 파종 계획 주민등록 사실조사, 산불예방홍보물, 농민교육 대상자 선정, 새마을 지도자 교육소집, 민방위 교육대상자 연락확인 ,재산세 과세 자료조사 , 옥수수 수매계획 통보 ,지방세체납자 징수 독촉 등등 제목조차 열거하기 힘들다.

다음날 아침 하숙집에서 일찌감치 아침을 먹고 모든 서류를 배낭에 짊어지고 면사무소 동료직원이탄 90cc 공무용 오토바이 뒤에 매달려 큰길 까지 타고가다 농로길서부터는 부지런히 걸어도 족히 3시간을 가야 마을 입구에 닿는다.

거기서 이장님 댁을 가려면 1시간은 더 가야 한다. 겨울 철 이라 산판 차도 없어 단단히 마음먹고 걸어야 한다.  

유포리 담당 부락을 맡은 지 3개월째로 이장님 댁은 딱 한번 가보았다. 군단위에서도 오지로 불리는 곳으로 면소재지에서 60리길 흥정리 산기슭에서 시작해 금당산 사이로 흥정천이 방림 방향으로 흐르고 북쪽으로는 태기산이 웅장하게 지키고 있다.

해발 400m 가 넘는 이곳은 초등하교가 1개 있고 주민은 산발적인 자연부락으로 50여 가구가 살고 있다.

도로는 산판차가 간신히 다니고 오토바이를 억지로 몰고 가다 연신 시동이 꺼져 재시동을 걸기위해서는 시간이 필요했고 도로는 비포장으로 돌과 비탈진 곳이 많아 오토바이 운전도 보통 힘든 것이 아니다.

이곳의 교통수단은 이장님 오토바이 한대와 산판 트럭이 고작이며 주민들은 대부분 30리길을 걸어서 버스를 타곤 한다 .

주민들 생계수단은 산골 도랑 어귀에 논 몇 다랑 있고 모두 비탈진 화전 밭으로 화전민들이 일궈놓은 밭은 더 이상 경작 못하도록 일정 선을 표시해놓았으나 막무가내로 붙여먹는다.

미리 이장님 댁에 연락해 반장님들 까지만 오후1시까지 소집을 부탁드려 놓았지만 산 곳곳 에 산재해 있어 전체가 다 모이기는 여간 힘든 게 아니다.

유포리 동네사람들이 전체 한군데 모이는 날은 가을에 한번 있는 초등학교 운동회 날이란다. 이날은 동네잔치 날로 학생이 있으나 없으나 모두모여 돼지를 잡고 술과 떡을 푸짐하게 장만해 아이들과 어른 다모여 하루를 즐겁게 보낸다. 또한 이날은 면 담당서기도 마을 유지자격으로 개회식 때 면장님을 대신해 축사를 하기도 한다.

돌다리를 건너고 고개를 두어 개 넘어 이장님 댁에 도착하니 제일 먼저 마당가에서 개가 짖으며 마중을 하자 사랑문이 열리면서 허연 수염과 망건 속에 상투를 틀고 긴 담뱃대를 무신 이장님 부친께서 안방을 향해 “얘야 나와 봐라” 하고 이장님을 부르시자 “아이쿠 최 서기님 오시느라 수고 했습니다” 하며 반가이 맞이한다.

농한기라 반장님 다섯 분이 오셔서 가마니 짜는 것을 돕고 있었다. 이장님 부인도 나와 인사를 하며 윗방에서는 서넛이 모여 뻥튀기를 먹고 있다.

요즈음 면에서 이루어지는 각종사항들을 홍보하고 조사항목 요령방법들을 알려주고 회의를 마치고 나니 이장님 부인께서 밑바닥이 시커멓게 탄 찌그러진 냄비를 들고 들어오고 이장님은 윗방에서 대병 소주 한 병을 들고 나온다.

미리 앞개울에서 반장님들이 족대로 잡은 잡고기 매운탕은 퉁바우, 수수미꾸라지, 버들치, 중터리 피라미 열목어 등에 갖은 양념 다 넣어 푸짐하고 얼큰한 진짜 매운탕에 소주 한잔 하니 그만이다. 이장님 솜씨는 정말 고향 맛이다.

권커니 잣커니 대병 소주 두병을 비우고 3병째 반쯤 없어지니 해가 기울기 시작했다. 이장님은 자꾸 자고 가라고 하나 방 구조와 식구 수를 계산해보니 부친 방에서 부친과 함께 자야 할 판으로 담배냄새 와 찌든 홀아비 냄새로 도저히 안 되겠다 싶어 미련을 버리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반장님들도 모두 취했다. 지금 떠나 부지런히 가면 훤해서 큰 길 까지 도착 할 수 있으리라는 계산을 하고 반장님들을 두고 길을 나서자 벌써 산기슭에 이르자 태기산 긴 그림자가 드리워졌고 오솔길은 앞이 잘 보이지 않아 걸음도 점점 느려진다.

산 너머 갈 길이 아직도 멀어 마음을 고처 먹고 민가라도 나타나면 하룻밤 묵어갈 요량으로 부지런히 걷는다. 찬 디 찬 바람이 귀전을 때리고 더 이상 걸을 수 없게 되자 덜컥 겁이 났다.

그래도 희망을 잃지 말아야 한다는 각오로 산허리를 돌자 그때 불빛이 보인다. 나는 이제 살았구나 하는 안도의 숨을 쉬며 불빛을 쫒아 삽작문에 다다르니 이집에서도 개가 먼저 짖으며 주인이 나온다.

안녕하십니까? 면사무소 최 서기입니다. 이장님 댁에 들려 지름길 고개로 넘어가다 날이 어두워 하룻밤 쉬어갈까 하고 염치 무릎 쓰고 들어왔습니다. 하고 인사를 하자 “아이고 그러시구먼유 어서 들어오세요, 이 고개엔 저희 집이 마지막 집이여유 겨울철에는 이리로 사람들이 잘 안다녀 눈길이 아직 안 뚫렸을 겁니다.

반갑게 맞이한 얼굴을 보니 중년쯤 된 듯 했다. 고맙습니다. 하고 봉당에 신발을 벗고 좁은 마루를 통해 들어서니 방안 구석 한 곳에 등잔불만 어둠을 지키고 있어 동공을 크게 뜨고 주인 얼굴을 살펴보니 잘 보이지도 않는다. 별로 상쾌하지 않은 특유의 냄새가 코에 와 닿고 안내된 방 주위를 살펴봐도 사물이 잘 보이지 않는다.

조금 지난 후에야 방 한가운데 화로 불이 방안에 온기를 담당하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고 윗방에서 아이들이 떠드는 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그럼 식사도 못 했겠네요 하며 여보 저녁상 좀 차려와 하곤 아주머니를 부른다.

가끔식 방물장수나 모곡장수들이 자고 간다는 말을 하자 조금은 미안스러운 생각이 들었고 잠시 후 아낙이 밥상을 들고 들어오는 가 싶더니 하dis 밥 한 그릇과 된장국, 김치 장아찌가 사기그릇에 가지런히 차려져 있다.

이런 산꼭대기에 쌀이 어디서 나서 흰쌀밥을 해 먹을 까? 설마 손님 대접하느라 쌀밥만 새로 했나 하는 생각을 하며 한술가락 퍼 입에 넣자 머들머들하게 씹히는 것이 강냉이 밥이었다.

15년 전 어릴 때 처음 먹어본 기억 이후 오랜만에 배가 고픈 터라 한 그릇을 다 비웠다. 한창 식성 좋은 20대 후반 총각 이었으니까.

밥상을 물리자 몸도 풀리고 배도 불러 사방에 걸려있는 메주에서 냄새가 풍겨 나왔으며 콩과 옥수수 가마니와 늙은 호박도 있었고 세상소식을 알려주는 라디오도 하나있었다.

밤이 깊어 잠자리에 들자 주인아저씨와 막내 인 듯한 사내 녀석과 셋이 한 방에서 자고 부인과 여식은 윗방에서 잤다. 깔아준 이부자리에서 간장 냄새 같은 찌든 냄새와 베게는 목침인데 드러누우니 등허리가 배긴다. 방바닥 흙을 바를 때 흙 칼이 없었던지 손으로 대충 발라 울퉁불퉁했다.

자리는 짚자리로 깔아 냄새도 나고 주인장의 코고는 소리에 잠을 뒤척이다 보니 벌써 아랫집 개 짓는 소리가 아련히 들려오고 세차게 몰아치는 삭풍이 심신마저 오싹하게 만든다. 강원도 산골의 전형적인 겨울 풍경이다.

동이 틀 무렵 장 닭이 요란스럽게 홰를 치자 주인은 소죽 쑤러 나가고 산꼭대기라 해가 일찍 솟는 것 같았다. 몸은 찌뿌듯했다.

마당에 나가 집을 보니 통나무를 얼기설기 엮은 토담집에 지붕은 굴피를 얹은 것 이었고 화장실은 강냉이 섶으로 돌려놓았는데 안에는 돌다리 두개만 덩그러니 놓여있었다. 식구들은 아들과 여식 두 명으로 주인을 닮아 잘 생겼고 부인도 검정색 몸빼에 광목 저고리를 입었지만 미인이었다.

사랑채에 강냉이가 가득하고 소도 두 마리에 닭장에는 닭이 십여 마리가 있었다. 아침상은 어제 저녁처럼 강냉이 밥 인 것을 확실히 알 수 있었고 여전히 입에서 뱅뱅 돌아 반 그릇을 먹고 숭늉을 한 대접 마셨다.

주인아저씨는 오늘 면사무소로 민방위 교육을 가신다며 함께 나섰다. 아주머니께 매우 잘 먹고 잘 쉬어간다며 인사를 하고 옷을 입자 희뿌연 흙이 묻어있었다. 도배도 하지 않은 채 흙칠만 했기 때문이다.

아저씨는 강냉이 두 자루를 지고 주인도 나도 신발에 새끼를 감고 부지런히 걸었다. 왜 이런 산골에 살게 됐냐고 묻자 배운 것도, 가진 것도 없어서 10년째 새 조밭을 일궈 이렇게 산다고 한다.

다행히도 날씨는 많이 풀려 눈이 녹아 푸근해 덥기 까지 했고 길가에 버들가지는 하얗게 한 층 부풀어 있었다.

산동백 꽃망울이 연두색으로 변해 있었으며 산 계곡 얼음 장 밑으로 봄의 소리가 조심스럽게 흘러가고 있어 봄은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있다는 것 을 실감할 수 있었다.

어느덧 산마루에 올라 잠시 쉬자 상큼한 산바람이 살포시 땀을 식히고 지나간다. 계곡에 난 길을 따라 걸으니 물소리조차 경쾌하게 들린다.

도로변에 도착해 버스를 타고 면소재지에 오니 벌써 점심시간이다. 민방위 교육은 1시였으니 점심대접이나 해야겠다 싶어 자장면 집에 모시고 가자 그는 강냉이를 팔아 점심을 사먹으려 했다고 한다.

난 그 돈으로 꽁치라도 몇 마리 사가시라며 자장면에 따끈한 막걸리 한잔을 대접했다. 춥고 배고픈 겨울 하룻밤 쉬게 해주신 유포리 산곡대기 아저씨의 후덕한 인심에 감사한 마음을 담아 대접에 막걸리를 한가득 따라주었다.

그해 봄 면사무소를 떠난 지 27년 지금 유포리는 어떻게 변했을까? 강원도 산골 그 아저씨는 지금 어드메 살고 계시며 잘 살고 계시는지? 어느 곳에서든지 식구들과 오순도순 행복하게 오래오래 살아가시길 기원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