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구멍이 포도청이라고 대형마트 때문에 초주검을 당한 재래시장.

정월 초이튿날부터 가게 문을 열어놓고 눈 빠지게 손님을 기다리고 있는데 첫 손님으로 내 나이는 됐음직한 촌부가 설날 술독에 빠졌는지 눈알은 토끼눈처럼 빨갛고 푸석푸석한 얼굴로 성황당에 고사를 지낸다며 장보기를 하러 왔다.

깍지발 같은 손에 까칠한 얼굴! 삶의 고단함이 얼굴에 덕지덕지 묻어난다. “무엇을 드릴까요?” 공손하게 물었더니 게슴츠레한 눈으로 나를 쳐다보더니 내 인상이 바가지를 씌울 사람처럼 보이지 않았던지 속주머니 속에서 때가 꼬질꼬질 묻은 종이쪽지 하나를 내 앞으로 불쑥 내밀면서 퉁명스런 목소리로 “여기 적힌 대로 해 주시오.” 그 말 한마디 하고는 잠시 눈 좀 붙이겠다며 가게 한구석에 벌러덩 눕는다.

촌부의 모습을 보고 있노라니 측은한 생각이 들어 이불을 덮어주고 때 묻은 종이를 펼쳐보니 종이에는 글씨조차 술에 취한 듯 삐뚤삐뚤 조각포에다 돼지머리 하나 문종이 다섯장, 사고지 2권 그리고 양초 한곽에 향 한통이 적혀 있다.

촌부가 내민 종이에 적힌 대로 빠짐없이 고사 제물을 넣었는지 다시한번 확인하려고 때 묻은 종이쪽지를 펼쳐드는 순간 어린 날 성황당 당고사 제물을 가지러 갔다가 아랫마을 친구들과 맞닥뜨려 코피 터지게 싸운 일이 엊그제 일처럼 떠오르면서 입가에는 쓴 웃음이 번져난다.

지금이야 모두 다 옛날 이야기가 되어 버렸지만 내 어린시절에는 설날이 지나고 나면 두레 일하듯 앞집에서 떡국을 끓여 이웃과 나눠먹으면 그 다음날은 뒷집에서 떡국을 끓여 답례를 한다.
그렇게 하기를 정월 한달이 다 가도록 이어졌다. 그렇게 살았기에 이웃 간 정이 도타워져 아마도 이웃사촌이란 말이 생겨난 것은 아닐까?

그 날도 상길이네 집에 모두 모여 맛있게 떡국을 먹고는 곧장 창수네 집으로 밤마실을 갔다. 창수네 집에는 떡국을 일찍 먹은 친구들이 벌써 밤마실을 와서 넓지 않은 방이 미어터진다. 그런데 아무리 둘러봐도 창수는 보이질 않는다. “창수는 어디갔냐?” “읍내 갔어” “읍엔 왜?” “신발이 떨어져 신발 사러 갔는데 늦네.” 형철이가 이상하다는 듯 고개를 갸웃거리자 “그 자식 보나마나 영화구경 하느라 늦을거야.” 창수 속을 훤희 꿰고 있다는 듯 길상이가 궁시렁 거리자 “썩을 놈! 영화구경 갈거면 나랑 같이 갈 것이지 제놈 혼자 갔단 말이여?”

영화구경이라면 환장을 하는 영길이가 구경을 같이 못 가 속이 상하다는 듯 우거지 상을 해 가지고는 시큰둥한 표정을 짓고 있는데 갑자기 방문이 벌컥 열리면서 호랑이도 제말하면 온다고 창수가 들어오는데 얼굴이 동태처럼 꽁꽁 얼어 있다. 창수 꼴을 본 영길이가 고소하다는 듯 헤벌쭉 웃으면서 “나 빼놓고 혼자 구경 가더니 옹골지다 요놈!” “날씨가 추워 덜덜 떨기는 했어도 영화는 무척 재미 있더라” “제목이 뭔데?” 영화구경을 못간 영길이가 이야기라도 들을 요량으로 창수앞으로 바싹 다가 앉자 “야 임마! 구렁이 알 같은 돈 내고 본걸 내가 왜 맨입으로 이야기 해주냐?”

창수란 놈 영화구경하고 온 것이 마치 무슨 벼슬이라도 한 냥 으쓱거리며 언 몸을 녹이려는지 쩔쩔 끓는 아랫목에 벌러덩 드러 누우며 “야 너희들 돼지고기 먹고 싶지 않냐?”

고기를 못 먹어 환장을 한 친구들 돼지고기 소리에 눈을 화등잔 처럼 크게 뜨고는 입맛을 다시며 다음 말을 기다리고 있는데 영길이가 꼴깍 군침을 삼키며 “돼지고기가 먹고 싶다면 니놈이 먹게 해 줄 수 있냐?” “있지”
어떻게 ?“ ”그냥 가서 가져 오기만 하면 돼.“ ”야 이자식아! 돼지머리가 뉘집에서 꿔다놓은 보리쌀 자류냐? 그냥 가져오게.“ ”그 자식 의심은...“ ”내가 조금전 집에 오다가 봤다니까.“ ”오라 집에 오다가 순대 국밥집에서 팔려고 삶아놓은 돼지머리를 본 모양이로구나.“

“그게 아니고 동구 밖 성황당 앞을 지나오는데 영순이 아버지가 당고사를 지내신다며 김이 무럭무럭 오르는 돼지머리를 들고 성황당으로 들어가시는 걸 내 이 두 눈으로 똑똑히 봤다니까.” “그게 정말이냐?” 방안의 친구들이 모두들 반색을 하자 윗목에 앉아 있던 현수가 벌떡 일어서며 “창수말이 맞어. 우리 옆집 영순이네가 올해 당고사 유사라며 며칠 전 대문 앞에 금줄을 치더니 오늘 마실오다 보니까 떡 찌고 돼지머리 삶는 걸 나도 봤어.”

“야 이멀따구야! 그런 이야기를 왜 이제야 해.” 영길이가 화색이 만연한 얼굴로 벌떡 일어서더니 “야! 형들이 가져가기 전에 우리가 먼저 가서 가져오자.” 영길이 말에 싫다는 놈 하나없이 모두 다 일어나 시루떡과 돼지머리를 가지러 방문을 나서자 살을 에일 듯 칼날같은 설한풍이 와락 달려들어 살갖을 파고 들어 뼛속까지 시려오고 겨울동안 내린 눈은 녹지않고 그대로 쌓여 눈이 시릴만큼 하얗고 뒷산에는 부엉새가 “부엉 부엉”울어 무서움 까지 매달린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