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아, 그 때 내가 금봉이와 금봉이 부모님을 만나 과객을 우리 집이나 다른 집에 묵게 했어야 하는 건데. 내가 바보짓을 했구나. 정말로 내가 바보짓을 했어. 멀쩡하게 두 눈 뜨고 금봉이를 그 녀석에게 빼앗기다니. 아아, 이일을 어쩌면 좋단 말인가? 이일을......‘

갑돌이는 금봉이 아버지와 어머니가 크게 호감을 가지고 있었고 갑돌이도 그런 사실을 알고 있어서 얼마 안 가서 자신이 금봉이와 백년가약을 맺을 거라고 자신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런 희망이 이제 물거품이 되어 버린 이상 갑돌이는 견딜 수 없는 고통에 시달려야 했다. 매일밤 깊은 밤을 자지 못하고 뒤척거렸지만 뾰족한 수가 생각나지 않았다.

 ‘그래, 지금이라도 금봉이가 그 박달인가 뭔가 하는 놈을 잊게 만들어야 해. 더 늦기 전에 금봉이가 그 녀석을 잊도록 무슨 조치를 하지 않으면 영영 금봉이를 빼앗길 거야.’

갑돌이는 금봉이 어머니를 만나 보기로 하였다. 만나서 금봉이 어머니에게 구두(口頭)로 다짐을 받아내고 싶었다. 그렇게 해서라도 마음의 위안을 삼지 않으면 견딜 수 없을 것 같았다.

 밤새 뒤척이던 갑돌이는 다음날 아침 일찍 금봉이네 집을 찾았다. 갑돌이는 자신에게 늘 잘 대해주는 금봉이 어머니를 만났다. 금봉이 어머니를 만난 갑돌이는 벌겋게 충혈 된 눈으로 자신의 심정을 모두 말하였다.

 
 “갑돌아, 조금만 기다려 줄래? 우리 금봉이가 지금 그 박달 도령에게 정신이 잠시 나가 있어서 그러니 잠시만 기다리면 금봉이 마음도 정리가 될 거야. 말로는 그 도령이 고향 가는 길에 한번 들리겠다고는 하였지만 뜨내기 말을 어찌 믿을 수 있겠어? 그러니 조금만 더 참고 기다려 줘. 우리 금봉이가 잠시 그 도령에게 혹해서 그런 거니까. 나는 너를 우리 집 사윗감으로 점찍고 있으니까 너무 걱정하지 말어. 저 얘가 잠시 정신이 나가서 저러니 조금만 기다려보자."

금봉이 어머니는 갑돌이의 등을 다독거리며 설득하였다.

 “금봉이 어머님, 정말이지요? 정말 금봉이가 그 박도령에게 마음 준거 아니지요? 믿어도 되는 거지요?”

 “그럼, 그럼. 시간이 가면 금봉이도 그 도령을 잊을 거여. 내 생각에는 그 도령이 우리 집을 다시는 찾지 않을 거야. 분명해.”

 험-, 험-.

갑돌이와 금봉이 어머니가 나누는 이야기를 곁에서 지켜보던 금봉이 아버지 마음은 복잡해졌다.
 ‘그 도령은 과거에 합격하면 꼭 찾아 올 거야. 절대로 나와 우리 금봉이를 모르 쇠할 사람이 아니야. 암 아니고말고. 산골에서 태어나 땅이나 파먹는 저런 무지렁이 같은 녀석보다야 백번 천 번 잘났지. 그럼, 잘났고 말고.’

금봉이 아버지는 궐련을 말면서 박달 도령을 떠올렸다.

 “어르신, 금봉이 마음은 잘 추스르도록 도와주세요. 이렇게 부탁드리는구먼요. 저는 지금도 금봉이가 저의 배필이라고 생각하는구먼요. 금봉이가 하루 빨리 그 사내에게서 벗어날 수 있도록 마음을 잡아주세요. 저는 금봉이 아니면 안돼요. 제발, 제 부탁을 들어주세요.”

 험-, 험-.

갑돌이 금봉이 아버지에게 사정을 해보았지만 금봉이 아버지는 담배만 뻐끔뻐끔 피울 뿐 이렇다 저렇다 아무 말이 없었다.

 과거 날이 이제 열흘 앞으로 다가왔다. 박달 도령은 더욱 분발하여 과거준비에 온 힘을 쏟았다. 가지고 있던 노잣돈도 거의 다 떨어져 가고 있었다. 주모는 계속해서 박달 도령에게 추파를 던졌다. 어느 날 오후, 손님이 뜸한 시각 박달 도령이 잠시 방은 비운 사이에 박달의 옷가지를 모두 내와 빨래를 해서 뒷마당에 있는 빨랫줄에  널어놓았다.

 외출에서 돌아온 박달 도령은 주모의 행동에 신경이 쓰였지만 밀려있던 빨래를 해준 것에 대하여 한편으로는 고마워했다.

고향을 떠나온 지 석 달이 다되었지만 그동안 빨래를 하지 못한 빨랫감이 쌓여만 갔었다. 사내가 빨래를 한다는 것이 창피하기도 하고 행여 누가 보면 어쩔까 싶어 입던 옷을 먼지만 툭툭 털어 입곤 했었다.

 “주모, 고마워요. 내가 손수 빨래를 해 입어야 하는데 그대가 해주셨구려. 내 이 은혜는 잊지 않겠소.”

 ‘치이, 은혜 갚는 것은 아주 간단한데......’

주모가 하얀 치아를 드러내 놓고 배시시 웃으며 박달 도령에게 다가 왔다. 마침 아무도 보는 사람이 없었다.

 “박도령님, 이제 과거 볼 날이 얼마 안 남았어요. 제가 할수 있는 한 도령님 뒷바라지를 해드릴 테니 과거에만 전념하세요. 그동안 신경을 쓰게 해서 죄송해요. 저를 용서해 주실거죠? 저도 그날 밤 도령님을 그리 보내드리고 나서 마음이 편치 못했어요. 그러나 여인의 마음은 갈대와 같아서 늘 도령님 생각에 밤잠을 설치기도 하고 야속하기도 하여 제가 잠시 심술을 부렸어요. 이해해주셔요. 호호호호호......”

주모는 풍덕한 엉덩이를 흔들어 가며 박달 도령에게 달콤한 말을 건넸다.

 “고, 고맙네요.”

 “그리고 참, 박도령님, 오늘 밤, 주막 영업이 끝나고 잠시 찾아뵈면 안 될까요?”

 ‘오늘 밤?’

 “과거가 코앞으로 다가왔는데 밤에 시간을 내 달라니요?” 박달 도령은 지난번 일을 떠올렸다.

 “박도령님이 너무 공부에만 매달려 있다 보니 몸이 많이 축난 것 같아서 씨암탉을 잡아 푹 고아 드리려고요. 그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저는 병이 나고 말거에요. 아셨죠? 주무시지 말고 기다려주세요.”

손님들이 밀려들자 주모는 주방 보조하는 여인네 둘은 새로 두었다. 손님이 많아 주모는 즐거운 비명을 질렀지만 주막의 구석 봉놋방에서 박달 도령을 비롯한 과거 준비생들에게는 고역이었다.

 그러한 사정을 잘 알고 있는 주모는 어제 장기간 유숙하던 손님이 방을 비우자 박달을 얼른 그 방으로 옮기게 하였다. 혼자 사용하기에 충분히 넓고 깨끗한 방이었다.

주모의 속셈을 모르고 박달 도령은 고마워하며 독방을 쓰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