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앙시장 내 송병원

“부질없는 욕망과 욕심은 버리고 어느 시인의 말처럼 이 세상 소풍 끝나는 날 천국으로 돌아가 참으로 소풍이 아름다웠다고 이야기 할 수 있도록 살아가야 하지 않을까?”

기축년을 맞이한 것이 엊그제 같은데 속절없는 세월이 덧없이 흘러 어느새 소임을 다 하고는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지려고 부산하게 보따리를 싸고 있다.
새해 벽두에는 이런 저런 계획을 세워놓고는 꼭 지키리라 마음속으로 굳게 다짐을 했는데 지금 뒤돌아보니 모든 계획은 작심삼일인지라 도루아미타불이 되어 버렸다.
근 육십년을 살아오면서 인생이 허무하다는 말을 귓등으로 들었는데 이제는 어렴풋이나마 허무하다는 말뜻을 조금은 알 것 같다.
그동안의 삶을 뒤돌아보니 무엇 하나  변변하게 이루어 놓은 것도 없이 황혼기에 들어섰으니 젊은 날 계획도 없이 살아온 삶이 후회스럽다.
앞으로 살아갈 날이 살아온 날보다 짧기에 앞으로는 하루를 젊은 날 열흘처럼 생각하고 혼신의 힘을 다해 살아간다면 이승을 하직할 때 지금처럼 후회스러운 마음은 들지 않으리라.
하지만 인생은 빈손으로 왔다 빈손으로 가는 것. 육십을 넘긴 이 나이에 안달복달 한들 소 잃고 외양간 고치는 꼴은 아닐런지...
앞으로는 부질없는 욕망과 욕심은 버리고 어느 시인의 말처럼 이 세상 소풍 끝나는 날 천국으로 돌아가 참으로 소풍이 아름다웠다고 이야기 할 수 있도록 살아가야 하지 않을까?
마지막 잎새 처럼 외롭고 쓸쓸하게 걸려 있는 달력을 쳐다보니 어느새 동지가 지나갔다.
무에 그리 바삐 사는지 동지도 잊은 것이다. 늦었지만 동지를 입속에 밀어 넣고는 잘근잘근 씹어보니 가난했던 어린 시절, 집안이 가난해 먹고 싶은 팥죽을 끓일 수 없어 부잣집으로 팥죽서리 하러 같던 일이 떠오르면서 터진 팥자루처럼 입이 헤벌쭉 벌어진다.
똥구멍이 찢어질 정도로 가난하게 살았기에 아침밥 저녁죽도 감지덕지 하던 시절 동짓날 팥죽을 끓인다는 것은 언감생심 꿈도 못 꿀 일이다.
부잣집들은 동짓날 아침부터 동지팥죽을 끓인다고 난리법석을 떨고 있는데 우리집은 쥐죽은 듯 조용하기만 하다.
한낮이 지나고 저녁때가 되자 누구 집에서 팥죽을 끓이는지 구수한 냄새가 콧속으로 파고 들어 입속에는 군침이 가득 고여 목줄을 타고는 목구멍 넘어로 꼴깍꼴깍 넘어간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부엌을 슬쩍 넘겨다보니 팥죽을 끓이기는커녕 부엌바닥에는 우리 집 삽살이가 백호야 하고 엎드려 자고 있고 그 옆으로는 시래기가 양동이 가득 담겨져 아이를 밴 임산부처럼 퉁퉁 불어 있다.
부잣집들은 팥죽을 끓여먹는데 우리는 소처럼 시래기죽이나 먹어야 한다고 생각하니 울컥 화가 치밀어 자고 있는 삽살이를 냅다 걷어찼더니 삽살개가 “깨갱” 하고는 외마디 비명소리를 내지르며 삼십육계 줄행랑을 놓는다.
젠장! 어떤 놈은 부모 잘 만나 팥죽을 먹는데 나는 소새끼처럼 시래기죽이나 먹어야 하다니... 서글픈 생각에 시래기가 담긴 양동이를 걷어찼더니 부엌바닥 가득 시래기 판이다.
홧김에 한 일이지만 더럭 겁이 난다.
만약에 어머니가 아시기라도 하는 날에는 매타작을 당할 것은 불을 보듯 뻔한 일이다. 나중에 산수갑산을 가는 한이 있어도 한시바삐 도망질을 쳐야 한다.
그 길로 집을 빠져 나와 수숫대로 화살을 만들어 허공을 행해 무작정 쏘고는 화살을 찾으러 논바닥을 헤매는 데 동생이 저녁 먹으라고 고래고래 소리를 질러댄다.
동생을 앞세우고 집으로 돌아오니 발길로 걷어 채인 삽살개가 아양을 떨며 꼬리치고 와락 달려든다.
발길질한 것이 미안해 목을 끌어안아 줬더니 삽살이 혓바닥으로 내 얼굴을 쓱쓱 핥는다. 결국 삽살이와 키스로 화해한 꼴이 됐다.
방으로 들어가며 부엌을 슬쩍 넘겨다봤더니 부엌바닥에 쏟아 놓은 시래기가 양동이에 다시 담겨져 있다.
저녁은 무얼까 궁굼해 어머니 눈치를 살피며 밥상을 내려다보니 멀건 김치죽이 기차화통처럼 뜨거운 김을 토해 내며 올라 앉아 있다.
“어여 먹어라” 내가 시래기를 쏟은 줄 모르시는지 어머니 목소리가 부드럽다. 맛있는 팥죽을 생각하며 맛대가리도 없는 김치죽을 먹으려니 얼굴이 죽상으로 일그러진다.
멀건 김치죽을 한 숟가락 입속으로 떠 넣으니 맛대가리는 개코도 없는 것이 뜨겁기만 뜨겁다.
생각 같아서는 김치죽을 마당바닥에 패대기를 치고 싶지만 그래봤자 나만 손해니 울며 겨자 먹기로 뜨거운 김치죽을 후후 불어 마파람에 게 눈 감추듯 해치우고는 방을 빠져 나오면서 팥죽 못 먹은 분풀이를 방문에다 대신 풀 듯 방문을 쾅 소리가 나도록 쳐 닫았더니 재수 없게도 문바람에 등잔불이 꺼지면서 방안이 지옥이 돼 버렸다.
끝내 일을 저질렀다. “성냥이 어디 있더라” 어머니는 성냥을 찾으시는지 부산을 떠시는데 “야 이놈아! 그래가지고 방문이 부서지냐? 더 세게 쳐 닫지 그래” 화나신 아버지의 고함소리가 고막을 찢는다. 이럴 땐 삼십육계가 최고다. 잘못 걸렸다가는 복날 개꼴이 될 것은 불을 보듯 뻔한 일이다.
방에 불이 켜지기 전에 집을 빠져 나왔다. 날씨는 쌀쌀하고 갈 곳은 없고  쪽박 깨진 거렁뱅이처럼 처량한 신세가 돼 골목길을 오르락내리락 하고 있는데 때마침 옆집 길상이가 터덜거리고 골목길을 내려온다.
“길상아 어딜 가냐?” “너 데리러 가는데 잘 만났다” “무슨 일 있냐?” “가보면 알아” “야 임마 무슨 일인지 알아야 가든 말든 할 것 아냐?” “오늘이 동지 잖어” “동지 모르는 놈이 어디 있냐?” “동지 팥죽은 먹었냐?” “팥죽 같은 소리하고 자빠졌네.” “내 그럴 줄 알고 너 팥죽 줄려고 데리러 왔지” “느네 집 팥죽 끓였냐?” “아니” “야 이 썩을놈아! 팥죽도 안 끓인 주제에 무슨 재주로 팥죽을 준다는 게냐?” “너 진짜로 팥죽 안 먹을 거야?” “나는 됐으니 너나 배 터지게 처먹어라.”
오늘은 정말로 재수 옴 붙은 날인가 보다.
“크윽!” 하고 가래침을 끌어 올려 길바닥에 밷고는 돌아서려는데 길상이가 덥석 내 손목을 붙잡으며 “팥죽은 안 끓였어도 먹는 수가 있어” “귀신 씨나락 까먹는 소리 그만 하고 집에 가서 얼른 구둘장 신세나 져라” “헛소리 아니고 진짜라니까” “진짜고 가짜고 나는 다 싫으니 너나 가서 배 터지게 먹으라니까” “안 간다면 할 수 없지. 그럼 나 혼자 팥죽서리 하러 간다.” “뭐? 팥죽서리!” 팥죽서리 소리에 귀가 번쩍 뜨인다. 그런 방법도 있었구나.
내가 왜 진작 팥죽서리 생각을 못 했지?
팥죽 생각에  이게 왠 떡이냐 싶어 길상이를 따라나서는데 언제 왔는지 우리집 삽살이도 쫄랑쫄랑 내 뒤를 따라온다.
앞장을 선 길상이가 캄캄한 골목길을 돌고 돌아 마을에서 부잣집으로 소문이 난 박참봉네 집으로 간다.
“길상아 박참봉네 개는 사나워. 그러니 개 없는 집으로 가자.” “박참봉네 개는 나하고 친해. 그러니 그런 걱정은 하질 말어.”
길상이 말이 떨어지기 바쁘게 박참봉네 개가 마을이 떠나가라 하고 짖어대자 내 옆에서 살랑살랑 꼬리치던 우리집 삽살이가 번갯불 치듯 박참봉네 집으로 달려간다.
개들도 그들만의 언어가 있는지 마을이 떠나가라 짖어대던 박참봉네 개가 우리집 삽살이와 만나 재미있게 노는지 쥐죽은 듯 고요하다.
“야 빨리 가자” 길상이가 재촉을 해 댄다. 수박서리와 참외서리는 수도 없이 해 봤지만 팥죽서리는 난생처음이라 간이 콩알만 해 지면서 겁이 난다.
만에 하나 들키기라도 하는 날이면 무슨 창피인가? 들킨다고 생각하니 오금이 저려 길상이를 따라가지 못하고 장승처럼 박참봉네 담벼락에 기대어 서 있자 길상이가 내 속에 들어갔다 나온 양 “너 겁이나서 그러지?” “겁나긴” “그럼 왜 안 따라오고 장승처럼 서 있냐?” “오줌이 마려워서” 나는 재빨리 바지를 내리고 물(?)을 버리고 있는데 길상이란 놈이 내 등 뒤로 오더니 나 들어보라고 하는 말인지 “눈 큰 놈들은 원래 겁이 많더라” 하고 한마디 한다.
썩을 놈 내 눈 크는데 제놈이 뭐 보태준 것 있나 헛소릴 하고 자빠졌어. 길상이 말 한마디에 오기가 돋아 얼른 바지춤을 올리고 죽기 아니면 까무러치기 밖에 더 하겠냐는 심정으로 길상이 뒤를 따라 붙었다.
길상이가 도둑고양이처럼 살금살금 박참봉네 뒤안 쪽으로 간다. 바늘 귀에 꿰인 실처럼 길상이 꽁무니에 바싹 따라붙자 “야 임마! 이 옮아. 조금 떨어져서 따라와라”
이 썩을 놈의 종자가 도둑놈 종자인가 이런 상황에서도 농담을 하다니 그저 놀랄 따름이다.
앞서 가던 길상이가 우뚝 멈춰선다. 살짝 고개를 쳐들고는 담 넘어 박참봉네 뒤안을 훑어 보더니 팥죽을 어디다 퍼담아 놨는지 감이 잡히질 않는다.
“길상아 팥죽을 어디다 퍼 놓았을까?” “너는 그런 걱정하지 말고 여기 숨어서 망이나 잘 봐라.” “망보다 사람이 박참봉네 집으로 들어가면 어쩌냐?” “그럴때는 얼른 흙을 한줌 집어 담 너머로 뿌려라 알았지” “알았어” “그럼 한눈 팔지말고 망 잘 보고 있어라”
망을 잘 보라고 신신당부를 한 길상이가 두 무릎을 착 꿇더니 개처럼 엉금엉금 기어 담장 밑으로 뚫려 있는 개구멍을 통해 박참봉네 집안으로 기어 들어간다.
조금전 까지 잠잠하던 개가 미친 듯 다시 짖느다. 개짖는 소리를 듣은 순간 가슴이 덜컥 내려 앉는다. 조금전 집안으로 들어간 길상이를 보고 짖는 것은 아닌가 싶어 똥마려운 강아지마냥 담밑에 숨어 끙끙거리고 있는데 갑자기 집 뒤쪽에서 자박자박거리는 발자국 소리가 어둠을 뚫고 귓속으로 파고 든다.
누군가 박참봉네 집으로 오고 있는게 틀림없다.
누굴까? 담 밑에서 몸을 움츠리고 있으려니 발자국 소리가 조금씩 커지면서 어둠속에서 검은 물체 하나가 흐릿하게 눈속으로 들어온다. 걸어오는 자태를 봐서 남자가 아닌 여자인 것 같았다. 혹시 박참봉네 마님은 아닐까?
드디어 검은 물체가 내 옆을 지나가는데 그 사람은 내가 짐작한대로 박참봉네 주인마님이 맞았다.
머리에 작은 동이가 얹혀 있는 것을 보니 물어보나마나 윗마을에 살고 있는 시동생네 집에 팥죽을 갖다주고 오는게 분명하다. 이건 큰일이 나도 보통 큰일이 아니다.
지금쯤 길상이는 팥죽을 찾느라 박참봉네 부엌에서 난리굿을 하고 있을 텐데 들키지 않으려면 얼른 신호를 보내야 한다. 길상이가 일러준 대로 흙을 뿌리기 위해 땅을 더듬으니 땅이 꽁꽁 얼어붙어 흙은 안 잡히고 주먹만한 돌이 손에 잡히기에 급한 마음에 얼은 돌을 담 넘어로 던졌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돌 떨어지는 소리가 “퍽”하고 나는가 싶더니 뒤이어 “윽”하는 비명소리가 어둠을 뚫고 귓속으로 날아든다. 재수에 옴이 붙었는지 내가 던진 돌에 길상이가 대갈통을 정통으로 얻어맞은 모양이다. 이거 큰일이 나도 보통 큰일이 난 게 아니랴 싶었다. 아니나 다를까 박참봉네 개와 우리 집 삽살개가 길상의 비명소리에 놀랐는지 조금 전까지 짖지 않다 동네가 떠나가라 짖어댄다.
들키면 어쩌나 하는 마음에 가슴은 콩닥거리며 마구 뛰고 몸은 사시나무처럼 마구 떨린다.
도망을 칠까? 잠시 생각도 해 봤지만 나 혼자 살겠다고 길상이만을 남겨두고 의리 없이 혼자 도망갈 수도 없고 죽으나 사나 길상이와 함께 하리라 마음을 굳게 먹고는 길상이를 데리러 개구멍 속으로 머리를 들이미는데 안쪽에서 길상이가 팥죽그릇을 끌어 안고는 끙끙거리며 개구멍을 빠져 나오는 것이 아닌가!
길상이 모습을 보는 순간 돌아가신 할아버지가 살아 돌아오신 것 보다도 더 반가워 길상이 손을 움켜 잡고는 흔들자 길상이가 내 손을 끌어다 제놈 대갈통에다 올려 놓더니 만져 보란다. 더듬더듬 길상이 대갈통을 만져보니 머리 한가운데 도깨비 뿔 나듯 밤톨만한 혹이 치솟아 있다.
혹을 만지는 순간 미안한 마음이 들기는 커녕 웃음이 터져 나오려고 해서 얼른 혀를 깨물어 억지로 웃음을 눌러 참고는 “아프냐?” 물었더니 “야 이 썩을 놈아! 사람이 오면 흙 던지랬지 누가 짱돌을 던지라고 했냐?” 물어 보지나 말걸 괜스레 물었다가 욕만 바가지로 얻어 먹었다.
길상이는 대가리에 뿔이 났건 혹이 났건 팥죽을 훔쳐와서 기분이 좋은지 입은 터진 팥자루처럼 헤벌죽 벌려가지고는 좋아서 죽는다.
그날 밤에 먹은 팥죽은 참으로 맛이 있었는데 한강에서 노 젖듯 팥죽속에서 건진 새알심은 그야말로 꿀맛이었는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