약속시간에 맞춰 식당 안에 들어서는데 머리가 희끗한 아줌마, 아저씨들이 달려오며 「허세강선생님 맞으시지요! 저 000 이에요.」라고 서로 이름을 밝히며 나를 반겨 맞았다. 이구동성으로 「선생님은 예나 지금이나 변한 것 없이 똑 같으시네요」라는 말이 터져 나왔다.

어안이 벙벙하였다. 「그래 너 아무개 맞지!」라고 응수 했지만 실은 전혀 낯모르는 얼굴이었다. 하긴 헤어진지 40여년만의 상봉이니 그동안 강산이 네 번 변하였는데 바뀌지 않은 것이 무엇이 있었겠는가?

이들과의 만남은 내가 고등학교를 졸업하던 해인 1970년도 4월부터 약 1년 정도로 기억된다. 이젠 전설속의 이야기로 영화나 드라마의 소재였을 일을 이들과 함께하였다. 지금도 마찬가지지만 제천시의 8개 읍.면가운데 중학교가 소재하지 않은 곳은 금성면이 유일하다.

당시 금성면에는 금성초. 동막초 등 2개의 초등학교와 분교장 3곳이 있어 매년 200명 정도의 졸업생이 배출되고 있었지만 어려운 가정형편 등으로 제천이나 인근 타지역 중학교로 진학하지 못하는 초등학교졸업생(당시는 중학교가 의무교육이 아니었음)이 굉장히 많았다.

이를 딱하게 여긴 한 독지가가 이들을 위해 금성면 월림리 산 28번지에 허름한 스레트 건물을 지어 중학교 교육과정을 가르치는 금성고등공민학교(69.3.1- 74.2.28)를 설립 운영하였다.

이때 나는 이 학교 운영책임자이신 윤종철선생님의 소개로 중학교동창으로 현재 제천시청에 재직하고 있는 이춘호 자치행정본부장과 함께 한동안 학생들을 가르쳤다. 모든 것을 까맣게 잊고 있었는데 오늘 당시 졸업생 15명중 9명이 서로 연락이 되어 이들이 우리 셋을 초대하여 사은회를 개최하는 자리였다.

식사를 하며 한참동안 옛 추억을 더듬는 이야기가 오고가자 그때 그 시절의 모습이 조금씩 되 살아 났다. 정말 변해도 무지하게 변해 있었다. 오직 나 혼자만 그대로 인 것이 아닌가하는 착각 속에 빠졌다.

靑出於藍(청출어람)이라고 할까? 그 어려운 여건속에서도 모두 훌륭히 성장해 어엿한 사회인으로 자리매김 되어 나 이상의 기반을 잡고 있어 보였다.「선생님! 재학시절 제가 제일 작고 약하다고 저를 여러 번 업어주시고 하였는데 기억나세요?」라는 다정한 말을 건네왔다. 「으음, 글쎄 내가 그렇게 가슴이 따뜻한  남자이었던가? 근데 올해 네 나이가 몇이지?」라고 대답했다. 「1956년생이에요.」등에서 식은땀이 흘렀다.

얼른 호칭을 「너」에서 「여사」로 바꿨다. 「선생님 그러지 마세요. 그냥 얘! 순호야!」 라고 불러 달라고 했다. 당시 아무것도 모르는 철부지라고 생각한 단발머리 꼬마소녀가 나와 나이가 겨우 네 살 차이밖에 되지 않았다는 것을 40년이 지난 오늘에서야 깨달았다.

이젠 키도 나보다 크고 귀티가 흐르는 중년의 귀부인으로 건실한 기업체의 중견간부로 일하고 있다니 너무도 대견스러웠다. 「선생님! 요즘도 영어발음 좋으시지요. 허선생님의 영어발음은 진짜 오리지날 네이티브 스피킹었는데요. 저는 지금도 회사에서 영문카타로그를 읽어야 할 때가 있으면 선생님의 모습을 떠올려 많이 도움이 되고 있습니다.」라는 이근재의 말에 가슴 뭉클함을 느꼈다.

그래 君子三樂이 바로 이런 것이로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70년대 초 가난과 열악한 생활환경속에서도 꿈과 웃음을 잃지 않고 學不厭敎不倦(학불염 교불권; 배우는데 염증을 느끼지 않고 가르치는데 권태를 느끼지 않음)의 즐거움을 이들과 함께하였던 그 시절이 영화의 필림처럼 파노라마치며 지나갔다.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수 백 건의 회식이 있었겠지만 오늘처럼 화기애애하고 나 자신이 인정을 받는 의미있는 자리는 없었던 것으로 기억된다. 오늘은 「내게 가장 행복했던 하루」였다.

우리는 낮 12시부터 오후 6시까지 장장 6시간동안 아주 길고 맛있고 재미있고 즐거운 점심식사를 하였다.

자리를 파하며 건배제의가 있어 나는 「2009 己丑年은 기쁨과 축복이 가득한 해였는데 여러분들과의 만남이 바로 그것이었으며 다가오는 2010 庚寅年은 경사스런 일이 생기고 자신의 능력을 인정받는 해인데 여러분 모두 남에게 인정받아 더욱 발전하기를 기원한다는 멘트로 힘찬 건배제창을 하였다.

우리들의 우렁찬 함성은 겨울밤을 곱게 수놓으며 하늘높이 넓게 넓게 퍼져나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