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사내가 술자리를 파했을 때 이미 새벽이 넘은 뒤였다.

 박달도령은 눈이 침침하고 허리도 아파 바람을 쐴 겸 밖으로 나왔다.

 주막은 봉놋방 두 군데만 호롱불이 켜져 있고 나머지 방들은 불이 꺼져 조용했다.

어떤 방에서는 사내들의 코고는 소리가 천둥소리처럼 들리기도 하였다.

박달도령은 자신도 모르게 주모가 기거하는 방을 바라보았다. 불은 꺼져 있는데 방문 앞에 여인의 신은 보이지 않았다. 박달도령이 주막을 나서자 큰 개울이 나타났다.

 개울에 나무로 얼기설기 만들어진 다리가 있는데 어른 한 사람이 겨우 건너갈 정도로 좁았다.

이제 막 이지러지기 시작한 만월이 중천에 떠있어서 개울에 흐르는 물이 은빛으로 물들어 있었다. 주막 뒤로 민가 서너 채가 있는데 지붕마다 큰 박이 서너 개씩 있는데 달빛을 받아 뽀얗게 빛을 발산하고 있는데  마치 성숙한 여인의 엉덩이처럼 보였다.

박달 도령은 그 박을 보고 금봉낭자의 나긋한 육신을 생각했다. 물레방앗간에서 정사는 박달도령에게 평생 잊지 못할 일이었다.

 고향에서는 여러 명의 처녀들이 유혹하여 한두 번 정도 은밀한 만남을 가져보기는 하였지만 정사를 가지지는 않았다.

생전 처음으로 성숙한 여인의 육신을 안아 본 감격은 죽을 때까지 잊을 수 없을 것 같았다.

금봉낭자와 정사를 생각하니 갑자기 몸이 뜨거워졌다. 그러나 지금은 사고무친(四顧無親) 낯선 한양의 깊은 밤중이었다. 화끈 달아오른 얼굴에 그만 박달 도령은 사방을 두리번거렸다.

 ‘이런, 이런. 과거에 전념해야 할 처지에 이상한 생각을 다하다니. 아아, 그러나 금봉이가 보고 싶다. 이 밤 잠들지 못하고 나를 생각하고 있을 텐데. 금봉낭자, 사랑하오. 내 반드시 과거에 합격하여 그대를 찾아가겠소.’

박달 도령은 중천에 더 있는 달을 바라보면서 혼자말로 중얼거렸다.

혹시나 누가 들었을까 싶어 다시 사방을 두리번거렸다. 박달도령의 순진한 행동에 중천에 떠 있던 달님이 빙그레 웃으며 박달 도령의 노고를 격려라도 하는 것처럼 구름에서 나와 박달도령의 잘생긴 얼굴을 비추었다.

박달도령은 개울가를 따라 천천히 걸었다. 달빛이 뽀얗게 쌓인 다리 위를 걸으며 달을 바라보았다.

 “달님, 달님, 벌말에 있는 금봉낭자는 잘 있는 거지요? 금봉낭자 소식이 궁금해 죽겠어요. 그녀도 이 밤 달님을 바라보며 저를 생각하고 있는지요? 혹시 이 밤에도 금봉이 달님을 바라보며 저의 과거급제와 금의환향을 위하여 지성을 드리고 있는 것은 아닌지요? 오늘밤 금봉이가 너무도 보고 싶습니다. 제 심정을 그녀에게 꼭 전해 주세요. 이렇게 비나이다.”

박달도령은 다리 위에 서서 합장(合掌)한 채 달을 올려다보며 중얼거렸다. 서천(西天)을 향해 흐르는 만월은 빙그레 웃기만 할 뿐이었다.

 “달님, 금봉낭자가 아무 탈 없이 지내도록 도와주소서. 밤낮 저를 위하여 지성을 드리느라 병이라도 날까 걱정이 되옵니다. 그녀가 무탈하도록 도와주세요.”

박달도령이 달을 올려다보고 두 손을 비비며 허리를 구부정하게 굽혔다 폈다를 수십 번도 더 반복하였다.

 “어머나, 박달도령님 아니세요?”

 중천에 뜬 달만 바라보던 박달도령은 반대편에서 사람이 오는 것도 느끼지 못하고 있었다.

젊고 요염한 주모였다. 뭍 사내들이 끈끈한 시선을 던지며 유혹하던 그 주모가 갑자기 앞에 나타난 것이다. 늦은 밤에 어디를 다녀오는지 주모가 약간 비틀 거리는 걸음으로 박달을 향해 다가왔다.

 ‘아니, 주모가 이 야심한 시간에 어딜 갔다 오는 걸까?‘

 “흠-, 흠-, 어딜 다녀오시나 봅니다.”

박달도령이 달빛을 받아 더욱 요염해 보이는 주모에게 인사를 건넸다. 달빛에 주모의 검은 큰머리에서 기름기가 자르르 흐르며 색기(色氣)를 발산하고 있었다.

 “아니, 박도령님, 이 밤에 하늘을 올려다보시면서 뭘 그리 혼자 중얼거리셨어요?  고향에 두고 온 처녀라도 있으신가 봐요? 호호호호호호......”

 “아, 아니오. 가슴이 답답하고 마음도 울적해서 바람이나 잠시 쐬려고 나왔다가 달님에게 과거를 잘 볼 수 있게 도와달라고 빌었던 참이었어요.”

박달도령은 약간 떨리는 음성으로 간신히 대답하고 얼굴을 다시 붉혔다.

 “그러셔요?”

봉놋방에는 지방에서 올라와 과거를 준비하는 젊은 사내들이 여러 명 있는데 얼굴이 반반하고 젊은 주모는 유독 박달 도령에게 관심이 많았다.

낮에 어쩌다 시선이 마주치기라도 하면 주모는 박달도령에게 눈을 찡끗하면서 살포시 미소를 건넸다.

처음에는 그냥 그런가 했는데 두 번 세 번 서로의 시선이 마주 칠 때마다 젊은 주모의 시선과 미소는 박달도령에게 부담으로 다가왔다.

박달도령은 직감으로 주모가 자신에게 호감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고 가급적 주모와 시선을 마주치지 않으려고 하였다. 원수는 외나무다리에서 만난다더니 그 꼴이었다.

 “박도령님, 밤이슬도 차고 밤기운이 찬데 제방에 들어가셔서 저와 한잔 하시지 않겠어요? 이렇게 한데 계시다가 몸살이라도 나시면 안 되잖아요?”

 ‘한잔? 지금이 새벽인데 주모가 혼자 있는 방에서 한잔?’

박달도령은 한양 올 때 흥호에서 만난 고향 형님의 말을 떠올렸다.

 “아, 아니오. 나는 과거를 준비하는 사람으로서 어찌 주색(酒色)을 가까이 한단 말이오? 주모나 어서 들어가세요. 난 좀 더 바람을 쐬고 들어갈 테니......“

 “아이고, 세상에 위험한 밤길을 여인네 혼자가게 하는 사람이 어디 있어요? 도령님, 보아하니 한 잔 걸치신 것도 같은데? 그리고 저는 단지 국밥 말아 파는 주모일 뿐이에요. 저를 색가주(色酒家)의 여인으로 보시지 마셔요. 그냥, 주모에요. 국밥 말아 파는......”

 ‘아니, 이 여자가 내가 탁주 한잔 마신 걸 어찌 아누? 주색이라고 한 말이 거슬렸나 보군.’

 “박도령님, 그러지 말고 저와 제 방에 들어 딱 한잔만 더하시자고요. 네에?” 주

모는 애원하다시피 하였지만 박달 도령은 머뭇거릴 뿐이었다.

 ‘말씀은 고마우나 아니 되오. 야심한 시각에 남녀가 유별한데 그것도 새벽에 여인이 쓰는 방에서 술을 마신단 말이오? 아니 되오.’

박달도령은 목구멍까지 올라 온 말은 하지 못하고 주저거렸다.

 “아, 아닙니다. 이제 들어가 자야지요. 보시다시피 밤이 너무 늦었습니다. 이제 머리도 식혔으니 방에 들어가 자야지요.”

 ‘아니 이런 숙맥이 다 있나? 공짜로 준다고 해도 못 먹으니. 어휴, 바보가 따로 없군. 내가 사람을 잘못 보았나? 보기에는 호색한(好色漢)처럼 생겼는데......’ 

 “아따, 사내대장부가 겁도 많으세요. 제가 잡아먹기라도 할까봐서 그러세요? 호호호호......”

주모는 허리를 잡고 우스워 죽겠다고 깔깔거렸다.

 “그, 그것이 아니라. 밤이 너무 늦어서......”

 “자, 이리오세요. 그동안 제 집에 계시면서 제가 혹시 불편하거나 잘못한 거라도 있을 것 같아 죄송한 마음에 술 한 잔 대접하려는 거예요. 거절하지 말고 어서 같이 가세요.”

주모는 박달에게 팔짱을 끼더니 막무가내로 박달을 데리고 주막으로 향했다.

 “주, 주모, 누가 보면 어쩌려고 이러시오?”

 “이 새벽에 누가 봐요? 달님 말고 볼 사람 아무도 없으니 걱정하지 말아요.”

주모는 발가스름한 얼굴로 달을 한번 쳐다보더니 방글방글 웃으며 박달도령을 올려다보았다. 달빛을 받아 단아하고 푸르스름하게 빛나는 박달도령의 뛰어난 얼굴에 주모는 그만 가슴이 울렁거렸다.

 ‘아아, 정말로 보기 힘든 선풍도골(仙風道骨)이로다. 어떻게 이런 헌헌장부가 우리 주막에 왔을꼬? 나와 무슨 인연이 닿으려고 한 걸까? 나의 한을 풀어주기 위하여 오신님이 분명할거야. 나의 깊은 한을 풀어주시기 위하여 오신......’

주모는 부리나케 걸으면서 전후좌우를 살폈다. 다행히 달이 구름 속으로 들어가 길은 어두워 지척을 분간하기 힘들 정도였다. 두 사람 말고 다행히 새벽길을 다니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자, 어서 들어가세요. 어서요. 혹시 누가 보면 곤란하니까 어서 들어가세요. 미투리는 들고 방으로 들어가세요. 뒷간에 들락거리는 사람들이 보면 이상하게 생각할 수 있어요. 아무 생각하지 마시고 어서 들어가세요. 어서요.”

주모의 강권(强勸)에 못 이겨 할 수 없이 여인이 혼자 쓰는 방에 들어오기는 하였지만 왠지 불안하였다.

주모는 남편도 자식도 없는 홀몸이었다. 박달 도령이 기거하는 방과 다른 봉놋방 모두 불이 꺼져있었고 남정네들의 코고는 소리만 요란하였다.

 주모가 얼른 호롱불에 불을 붙였다.

박달도령은 주모의 방에 들어서면서 눈이 휘둥그레졌다.

주막에서 억센 사내들을 상대로 국밥과 술을 파는 여인치고는 방이 제법 깨끗하고 소품들이 정갈하게 놓여 있었다. 이상한 것은 조그만 탁자 위에 책이 몇 권 놓여 있었다.

본능적으로 박달 도령의 시선이 책으로 쏠렸다. 자세히 살펴보니 대학(大學), 논어(論語), 맹자(孟子), 춘추(春秋), 예기(禮記), 명심보감(明心寶鑑) 등 매일 같이 대하는 서책들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