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서 오세요. 소녀 난향(蘭香)이라 하옵니다.” 날개옷을 입은 절세가인이 박달 도령에게 허리를 굽혀 환하게 웃고 있었다. 박달 도령은 여인을 보고 깜짝 놀라서 그 자리에 굳어 버렸다. 그 여인은 다름 아닌 박달 도령이 늘 보아오던 족자 속의 선녀였다. 족자 속의 옷차림이며 살포시 웃는 모습. 분명 족자 속의 그 선녀가 틀림없었다. 박달 도령은 허벅지를 꼬집어보고 혀를 깨물어 보았다. 통증이 전해졌다. 틀림없는 현실의 세상이 분명하다고 생각한 박달 도령은 그제야 자신의 염원이 이루어졌다고 판단했다.
 자세히 눈을 들어 보니 오색구름이 솜사탕처럼 하늘을 날고 청학 천여마리가 날며 노래를 불렀다. 시녀들이 비파를 타고 생황을 부니 수백의 반라(半裸)의 무희들이 학들과 어울려 허공에서 노닐고 있었다. 난향이 옥고(玉膏)라는 단약을 박달 도령에게 주며 삼키라고 하였다. 한 알만 먹어도 몸이 저절로 새털처럼 가벼워지고 하늘위로 오를 수 있으며, 육체를 이탈하여 천변만화의 조화를 부릴 수 있는 약이라고 하였다. 난향은 박달 도령의 손을 잡고 주연이 마련된 대청으로 안내하였다.
 “이것은 서왕모께서 소녀에게 하사하신 것입니다. 소녀, 예전부터 인간세의 도령님을 흠모하고 있었사옵니다.” 난향은 은쟁반 위에 수정구슬이 굴러가는 소리로 말하였다.
 “인간인 나를 ?‘ 박달 도령은 다시 한 번 허벅지를 꼬집어보았다.
 “박달 도령님, 부디 선량한 사람들을 위해 복을 많이 지으소서. 또한 도령님께서 세우신 대의(大義)를 꼭 이루시어 만백성이 편히 살 수 있도록 하소서.” 난향은 말을 마치자 박달 도령에게 절을 하였다. 박달 도령은 고마움의 표시로 난향의 살며시 안아주었다. 그러자 곁에서 시중을 들던 시녀들이 고개를 옆으로 돌렸다.
 “소녀, 도령님이 도착하기 전에 지은 시 한수가 있사옵니다.”
 “오오, 그래요? 한번 듣고 싶습니다.” 난향이 즉석에서 시를 읊었다. 시를 읊는 난향의 목소리가 얼마나 낭랑하고 고운지 금방 귀가 멀 것 같았다. 악사들이 난향의 시를 읊을 때 반주를 넣어 조화를 이루었다.

    밤안개 물러가 허허로운데
    태산에 걸린 가녀린 그믐달만 바라보네
    달 속에 옛 정인이 앉아 있는데
    차마 다가가지 못하고 손가락만 물고 있네

 “오오, 절창이오. 내 그대의 심정을 알 것 같소. 이리 오시구려.” 박달 도령이 술병을 들어 난향에게 술을 따르며 난향의 얼굴을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박달 도령은 난향과 수작(酬酌)하면서도 자주 허벅지를 꼬집어보았다. 술이 거나해지자 박달 도령이 일어섰다.
 “내 이번에는 그대의 시에 답해야 겠소.”
 “호호호호호......, 좋습니다. 소녀도 도령님의 마음이 무척 궁금하옵니다.” 난향은 붉은 입술이 더욱 붉게 빛나고 하얀 치아가 아름다웠다.

    그대는 이미 저 난새들같이 짝을 찾았다오
    미풍이 불어와 장부의 마음 뒤흔드니
    내 어찌 홀로 베개를 벨 수 있으리오
    동창東窓이 여명에 촉촉이 젖을 때 까지
    동방洞房에 화촉華燭을 밝히리라

 박달 도령이 즉석에서 시를 지어 읊자 난향을 비롯한 수많은 시비(侍婢)들은 숨을 죽였다. 사내의 당당하고 활기찬 목소리에 여인들은 중간 중간 비음(鼻音)을 토하기도 하고 여기저기서 탄식 소리가 들리기도 하였다. 박달 도령과 난향은 계속 잔을 주고받으며 점점 흥에 빠져들었다. 밤이 깊어가자 보랏빛 이슬비가 내리고 이름을 알 수 없는 꽃잎이 눈처럼 날렸다. 난향은 이미 홍조(紅潮)가 얼굴에 가득했다.
 “소녀, 예전부터 도령님을 뵙고 함께 하고 싶었사옵니다.” 난향이 고개를 더욱 숙이며 부끄러워하였다.
 “너무 상심하지 마오. 하늘에 떠있는 구름이 나입니다. 그대를 보고 싶으면 비가 되어 그대 가슴에 내릴 테니 비가 내리면 피하지 마오.” 난향이 박달 도령의 말에 잔에 술을 따르며 장탄식 하였다.
 “도령님, 남녀의 사이는 한치 앞을 볼 수 없습니다. 오늘은 서로 좋다하여 꿀 같은 말로 상대 가슴에 꽃을 심지만 하룻밤을 자고 나면 바람이 불고 눈이 내리지요. 요즘처럼 서로를 위해주는 마음이 없는 풋사랑은 싫습니다. 도령님께서 저 달 속의 정인(情人)이 되면 어떠할 지요? 소녀는 이제 세상사는 재미를 느낄 수 없었습니다. 도령님, 아무리 공부가 중요하지만 곁에 여인이 있는데 어찌 술만 드시고 계시온지요?” 난향은 비단 손수건으로 살며시 눈가를 닦았다. 
 “남녀의 정분(情分)은 하늘이 맺어주는 것이지요. 그러나 하계(下界)의 작금 세태는 이러한 천기(天紀)를 마치 헌신짝 취급을 합니다. 사랑과 정을 황금으로 바꾸는 자들은 자기 스스로를 황금과 바꾸는 우매한 자들이지요. 갈수록 흉악한 일이 일어나는 것은 모두 이같이 정을 돈으로 산 까닭입니다. 그러한 부모에게서 태어나는 자식들 또한 찬피를 지니고 태어나 세상을 훔치려 하겠지요.” 난향은 박달 도령의 말을 가만히 듣고만 있었다
 “소녀는 진정 마음을 다해 참사랑을 찾고자 하였으나, 마음과 같지 않사옵니다. 어찌해야 좋을 지요.” 난향은 박달 도령의 눈치를 보며 말끝을 흐렸다.
 “내 오늘밤 그대 가슴 속에 꽃씨를 심어도 되겠소?”
 “소녀의 마음 이미 진인님이 훔쳐갔사옵니다.” 박달 도령은 시비들을 물리고 난향에게 춤을 부탁했다. 백옥 같은 이마, 붉은 입술, 바람 불면 날아갈 것 같은 맵시. 술에 취하고 춤에 취하고 미인에 취하니 세상에 부러울 것이 없었다. 박달 도령이 난향에게로 다가가니 살포시 안겨온다. 하늘을 날던 청학들이 일제히 큰 소리 울며 축복의 노래를 부르며 하늘 위 아래로 날아올랐다. 두 사람이 밤이 깊어가는 줄도 모르고 술도 마시고 시를 읊기도 하며 함께 춤을 추기도 하였다. 꿈결같은 시간은 너무빨리 지나갔다. 어느새 동이 훤히 터오기 시작했다. 박달 도령이 마지막 잔을 비우고 자리에서 일어나니 난향이 울며 소매를 잡았다.
 “도령님, 이렇듯 소녀의 마음을 가져가 놓고 무정하게 떠나시면 소녀 더 이상 살아가기 힘듭니다.” 시비(侍婢)들도 일제히 엎드려 주인의 소원을 들어달라며 박달 도령에게 애원하였다.
 “그럼, 내 오늘 하루만 그대의 소원대로 하겠소.” 박달 도령이 난향을 덥석 안고  침방(寢房)에 들어 늦도록 구름이 되고 비가 되니 난향은 천지(天地)를 오르내리며 열락(悅樂)의 기쁨에 말을 잊지 못하였다.
 ‘그렇다면 그 남자 신선이 나란 말인가? 아냐, 이건 말도 안 돼. 한낱 상상일 뿐이야. 망상이야. 망상.’
 “박달 도령님, 무엇을 그리 골똘히 생각하셔요?”
 “응? 아, 아니오. 아무것도 아니오.” 박달 도령은 방금 그려본 달콤했던 꿈이 들킨 것 같아 말을 더듬기 까지 했다.
 “박달 도령님, 소녀, 가슴이 터질 것 같습니다. 꿈 속에서 사랑을 나눴던 임이 실제로 소녀의 앞에 나타나는 이 신기하고 오묘한 일에 소녀는 지금도 가슴이 떨리고 다리가 후둘 거립니다. 예전에는 몰랐는데 처음 박달 도령님을 뵙고나서 제 가슴이 터질 듯 벌렁거립니다. 지금 이 순간에도 소녀의 가슴은 멈출 줄 모르고 격렬하게 뛰고 있답니다. 이러다가 소녀의 심장이 터져버릴 것 같습니다. 이 일을 어찌하여야 할지 소녀는 답답하기만 하답니다.” 금봉이는 가늘게 흐느끼는 것 같았다. 가녀린 금봉이의 어깨가 천천히 아래위로 들썩였다.
 “나도 언젠가 부터인지 낮잠을 자면 그 얼굴의 윤곽은 뚜렷하지 않지만 어떤 여인과 운우의 정을 나눈 적이 있었습니다. 몇 번 그런 꿈을 꾸었는데 지금 가만히 생각해보니 그 여인이 바로 낭자가 아닌가하는 생각이 듭니다.” 박달 도령은 족자 속의 선녀를 그려보았다.
 ‘어쩌면, 꿈속에서 인애했던 선녀와 금봉이 똑같을 수가 있단 말인가? 이게 무슨 기이한 인연인가?’
 “어머나, 그게 정말이세요?”
 “그럼이요. 내가 그대에게 거짓말을 해서 무엇 하게요?”
 “그럼, 소녀와 도령님은 이미 꿈속에서 인연이 맺어진 듯 하네요. 저, 어쩌면 좋아요? 처음 뵙는 도령님이 마치 십년 이상 사귄 분 같으니 소녀의 마음을 알다가도 모르겠어요. 정신이 몽롱하고 가슴이 쿵쾅거려 잠시도 안정을 찾을 수 없어요.” 금봉이 두 손으로 가슴을 감싸 안으며 박달 도령에게 살며시 기대어 왔다.
 “금봉이......” 박달 도령이 한 팔로 금봉을 살며시 안았다. 금봉이 기다리고 있었던 것처럼 박달 도령의 품에 안겨왔다. 갑자기 박달 도령의 심장이 쿵쾅거리며 기분이 묘하면서 구름 위에 붕 뜬 것 같았다.
 “그, 금봉이, 내 그대를 인애해도 되겠소?”
 “남녀 간의 사랑을 누구에게 허락받고 하시나요? 소녀, 이미 도령님을 처음 뵐 때 중심을 잃었습니다. 지금 이렇게 도령님 품에 안겨있다는 사실이 꿈이 아니길 바랄 뿐이에요. 지금 이 순간에도 소녀의 가슴은 금방이라도 터질 듯 마구 뛴답니다. 이 감정을 어찌 다스려야 할지 모르겠어요.” 
 “아니오. 이건 절대로 꿈이 아니오.”
 “그렇죠? 진정 꿈이 아니지요?” 
 “금봉이, 이건 절대로 꿈이 아니오." 박달 도령은 두 팔로 금봉이를 안아주었다. 성숙한 처녀의 젖가슴이 콩닥거리며 사내의 넓은 가슴에 닿았다. 박달 도령은 고향에서도 자신에게 일방적으로 정을 주었던 여인이 있었지만 과거를 준비해야하는 부담으로 그냥 불장난 같은 사랑에 만족해야 했다. 과거 공부를 하는 동안에도 박달 도령의 준수한 외모에 반한 처녀들이 자주 추파를 던졌지만 먼 훗날 자신이 과거에 급제하면 꽃 같은 처녀들이 줄을 서서 자신에게 달려 올 것을 꿈꾸면서 박달 도령은 용암처럼 끓어오르는 욕망을 간신히 억눌러 왔었다.
 “소녀, 오늘밤 도저히 잠을 이룰 수 없을 것 같습니다. 왜 이제야 나타나셨는지요?  도령님은 소녀가 꿈속에서 만났던 그 헌헌장부님이 틀림없습니다.”
 “정말이지요?” 박달 도령은 두 팔에 힘을 주었다. 금봉이 박달 도령의 품속에 깊이 안겨왔다. 박달 도령은 지금 꿈을 꾸고 있다고 생각했다. 조금 전까지 산짐승에게 쫓겨 목숨이 위태로운 지경에 있던 사실을 까맣게 잊고 천상의 선녀를 만나 달콤한 꿈을 꾸고 있는 것이 분명하다고 혼자 속으로 중얼 거렸다.
 “네에. 박달님은 제 꿈속에 나타나 소녀와 부부의 연을 맺은 후 소녀는 자주 잠을 설치곤 하였사온데, 그 임이 지금 이 순간 제 앞에 계십니다."
 “나와 그대는 보통 인연이 아니구려.” 박달이 뜨거워진 입술로 금봉이의 입술을 지그시 누르며 포갰다. 달콤하면서 촉촉한 산골 처녀의 입술에 순정이 뚝뚝 흘렀다.  금봉이도 박달 도령의 입맞춤에 별 저항 없이 받아들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