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길이 형님.”

 “박달아, 잠시 좀 앉아 있어라. 지금 몹시 바쁘니 나중에 다시 올게.”

 “네에. 형님, 일 끝날 때까지 기다릴게요.”

사내는 휑하니 방을 나가 버렸다. 박달 도령은 충격을 받은 듯 멍하니 천정만 바라보며 앉아있었다.

 ‘이상하다. 어떻게 대길이 형님을 여기서 본단 말인가? 지금쯤 조정이나 지방 어디서 관리로서 출세가도를 달리고 있어야 할 형님이 어떻게 이런 색주가에서 머슴 생활을 하고 있단 말인가? 아아, 알 수 없는 일이로다.’

박달 도령은 남아있던 술을 모두 따라 들이켰다. 여우에 홀린 기분이었다.

 “이보시오, 여기 술 한 병 주시오.”

주모가 인심을 쓰기 위하여 공짜로 준 술 한 병이 동이 났다. 박달 도령은 아무리 생각해보아도 이해할 수 없었다. 마을에서 같은 서당에서 동문수학 할 때 대길이 형은 후배들의 우상이었다.

그런 우상이 초라한 모습으로 앞에 나탄 것에 대하여 박달 도령은 인생이 과연 무엇이냐는 물음을 곁에 고승대덕이 있으면 묻고 싶었다.

 “박달아, 많이 기다렸지. 미안하구나. 너에게 이러 모습을 보여줘서......”

주막에 손님이 뜸하자 사내가 박달이 있는 방으로 들었다.

 “대길 형님, 한잔 드시겠어요?”

 “아, 아니다. 아직 일이 안 끝나서......”

 “괜찮아요. 딱 한잔만 하세요.”

 “그, 그럴까 그럼.” 사

내는 밖을 한번 쳐다보고 술 한 잔을 순식간에 비웠다. 그 모습이 우습기도 하고 측은하기도 하여 박달 도령은 그만 눈물을 흘릴 뻔 했다.

 “나, 이런 모습 보고 많이 놀랬지?”

사내가 소매로 입가를 쓱 닦으면서 박달 도령을 보고 씩 웃어 보였다.

 “대길이 형님, 어찌된 일이에요?”

 “내 이야기 다하려면 밤을 새도 모자랄 것이야. 대충 이야기 해주지.”

사내는 술병을 들더니 빈 잔에 탁주를 가득 따라 단숨에 마셔 버렸다. 잔을 비운 사내는 천정과 방바닥을 번갈아 보면서 한숨을 쉬었다.

 “박달아, 명심해라. 세상의 여자는 천국(天國)이면서 동시에 지옥(地獄)이란다.”

 ‘천국이면서 동시에 지옥?’

5년 전 사내는 청운의 꿈을 안고 지금 박달 도령이 가는 뱃길을 이용하여 한양에 입성하였다.

그 역시 한양에 연고가 없는 터라 세검정에 있는 주막에 짐을 풀고 과거를 준비하였다.

사내가 묵고 있는 주막의 주모는 얼굴이 반반하여 주막은 언제나 주변에서 한가락 하다 사내들이 들끓었다. 주모를 유혹하는 자들은 하나같이 불량기가 있는 사내들로서 무식하고 행동이 거칠었다.

사내가 과거에 합격하자 주모는 사내의 과거 입격을 축하한다면서 잘 아는 여인을 소개시켜 주었다.

주모가 소개시켜 준 여인은 남편이 과거에 번번이 낙방하여 과거에 한을 품고 죽어서 홀로 쓸쓸하게 살아가는 과부였다.

 사내는 마음에 여유가 있는 터라 스스럼없이 여인을 만났다. 여인은 많은 재산을 가지고 있었다.

사내는 그 여인의 집에서 기거하게 되었고 첫눈에 여인의 미모에 사로잡혀 공부를 소홀히 한 사내는 그만 2차 시험인 복시(覆試)에 낙방하고 말았다.

사내가 복시에 떨어지자 여인은 사내를 멀리하기 시작하였고 결국 여인의 집에서 내쫓기고 말았다.

여인 때문에 시험에 낙방하였다고 판단한 사내는 여인에게 3년만 있으면 틀림없이 과거에 장원급제 할 테니 한번만 더 뒷바라지를 부탁하였지만 여인은 냉정히 거절하였다.

 여인에게 새로운 남자가 생긴 것이었다. 사내는 충격을 받고 여인과 그 여인의 정부를 죽이기로 마음먹었다.

 어느 날 밤, 사내는 가슴에 비수를 품고 여인의 담장을 넘어 여인이 잠든 방을 기어들었다. 여인은 마침 새로운 정부(情夫)와 단잠에 빠져 있었다.

사내는 비수를 뽑아 휘둘렀으나 여인에게는 부상을 입히고 정부의 목숨을 빼앗았다.

사내는 그 길로 방물장수로 변장을 하고 하삼도(下三道)를 전전하다가 지금의 주막에 숨어들어와 머슴을 살게 되었다. 사내는 박달 도령에게 자신의 불행을 이야기 해주면서 박달 도령에게 신신당부하였다.

 “아아, 형님, 형님이 어떻게 그런 불운을 겪게 되었는지요?”

 “박달아, 너는 여인들에게 호감을 주는 인상이라 특별히 주색(酒色)에 각별히 조심해야 한다.”

 “형님, 고맙습니다. 저에게 다시 한 번 여인에 대하여 경각심을 심어 주셨습니다. 조심하겠습니다. 부디 몸 건강하시고 만수무강하세요.”

 “자네 볼 면목이 없어. 나야 이제 이렇게 살다가 죽으면 끝이지만 앞날이 구만리 같은 자네는 부디 장원급제하여 고향에서 고생하시고 계신 노모와 마을 분들에게 웃음과 행복을 선사하시게. 부디, 내 말 명심하고......”

 “네에, 형님.”

박달은 사내와 늦은 밤까지 수작(酬酌)하면서 과거와 한양의 생활에 대하여 허심탄회하게 이야기를 주고받았다. 새벽이 되어 배로 돌아온 박달은 쉽게 잠을 청할 수 없었다.

초췌한 고향 형님의 모습이 자꾸만 눈에 아른 거렸다.

다음날, 배는 새벽 물안개를 뚫고 한양을 향해 돛을 올렸다.

흥호 앞 강나루에는 한양에서 소금과 가재도구 등 생활 필수품을 잔뜩 실은 상선(商船)들과 지방에서 한양으로 공물(貢物)과 세미(稅米)를 실은 배들이 뒤 엉켜 혼란스러웠다.

 “저기 저 우측에서 나오는 지류(支流)가 섬강(蟾江)이라 합니다. 강원도 횡성 봉복산에서 발원(發源)하여 횡성과 원주 문막 부론을 경유하여 이곳 강천(江川)에서 남한강과 합류하는데 하류에 두꺼비를 닮은 바위가 있다하여 붙여진 이름이지요. 이 곳은 물이 맑고, 모래사장이 하얗고 주변에 빼어난 풍광으로 유명하답니다. 그리고 좌측에서 흘러드는 지류는 청미천이라고 하는데 용인 땅 문수봉 계곡에서부터 시작되는데 장호원과 음성을 경유하여 이곳에서 남한강과 만나지요. 이곳이 세 강이 만난다하여 저기 보이는 저 부락을 삼합이라 한답니다. 이 고장은 땅이 기름져서 쌀이 아주 유명하지요.”

나이가 많은 사공이 뱃머리에 서서 동양화처럼 스쳐 지나가는 풍광을 보며 침을 튀겼다.

초행길의 사람들은 사공의 말을 귀담아 듣는 반명 김 선달처럼 자주 물길을 왕래한 사람들은 귀찮다는 듯 앉아서 멍하니 파란 하늘만 올려다 보았다.

 금방 물안개가 걷히면서 따가운 가을 햇살이 배 위로 꽂혔다. 사공들이 배 위에 포장을 쳐서 햇볕을 가려 주었다.

배는 때마침 불어오는 동남풍에 의지하여 순항하였다. 배가 서너 식경쯤 가니 빼어난 절경이 나타났다.

 “저기는 봉미산(鳳尾山)이라 하고 그 앞에 고즈넉하게 자리한 절은 신륵사(神勒寺)라 합니다. 저 절은 그 옛날 신라시대 때 지어진 절이라는데 고려 말기 나옹화상이 저 절에서 입적하여 저기 저 바위에서 다비하였다고 합니다. 지금은 세종대왕께서 이곳으로 천장(遷葬)하시어 영릉(英陵)의 원찰(願刹)이 되었다고 합니다.”

 늙은 사공은 가을 햇살을 받아 하얗게 보이는 절을 가리키며 손님들에게 설명해 주었다.

또한 이 고장은 예로부터 땅이 기름져 쌀이 풍성하고 밥맛이 뛰어나 상감마마께 진상한다는 말도 빼놓지 않았다. 배는 신륵사 앞 여강(驪江)을 지나 조포(潮浦)나루에 도착하였다.

 “자, 여러분, 점심을 드셔야 하니 저기 조포나루에서 간단히 요기를 마치시고 배에 오르세요.”

박달 도령은 산천경계가 빼어난 여강의 경치에 취하여 자신이 지금 어디에 있는지 잊고 말았다.

 ‘아아, 이렇게 빼어난 경승지(景勝地)가 있다니, 참으로 비경(秘境)이로다. 이 고장에 사는 백성들은 선택된 사람들이 틀림없어.’

 혼자서 경치에 도취해 중얼거리던 박달은 사람들이 우르르 내리자 그들 뒤를 따라 내렸다. 조포나루 역시 아침에 출항한 흥호 못지 않게 번화한 지역이었다. 수없이 늘어선 크고 작은 주막과 객사 그리고 난전, 잡화상, 대장간, 배를 수리하는 곳 등 이제가지 보지 못했던 장면이 눈앞에 펼쳐졌다.

조포나루는 이포나루, 광나루, 마포나루와 함께 조선시대 경기 충청 강원도 지역의 공물과 농산물 등을 실어나르던 상선들이 자주 드나들면서 여주 지역의 상권이 형성된 나루였다.

 “여기 국밥 한 그릇과 탁배기 한잔 주시오.”

박달 도령은 주막에 들려 엉덩이를 흔들어 대며 손님을 맞고 있는 젊은 주모에게 주문하였다. 곁에 김 선달이 마음이 맞는 축들과 앉아서 국밥이 나오기 전에 술잔을 기울이고 있었다.

 “박 도령 이리와서 한잔 하시구려.”

김 선달이 박달 도령에게 손짓을 하였다.

 “아닙니다. 선달님, 저도 탁배기 한잔 주문했습니다. 저 신경쓰지 마시고 많이 드세요.”

박달 도령은 얼른 식사를 마치도 조포나루터로 나왔다. 인심 좋고 미인들이 많이 출생한다는 여주에 발길을 닿은 박달 도령은 기분이 좋았다. 방금 마신 맛 좋은 이 고장 살로 빚은 탁주가 얼큰하게 올랐다.

 ‘나중에 벼슬을 하다가 나이들어 퇴직하면 이 고장에서 노후를 보내고 싶다. 그 곁에 금봉이가 있으면 금상첨화가 될 터인데......’

 조포나루에 잠시 들린 배는 여주를 지나 이포나루, 양평 두물머리를 경유하여 여드레 만에 마포나루에 도착하였다.

늦가을의 한양은 쌀쌀했다. 노잣돈이 넉넉하지 않은 박달 도령은 마포나루 가까운 곳에 짐을 풀었다.

비용을 아끼기 위하여 세 명이 함께 쓰는 퀴퀴한 곰팡내 나는 봉놋방을 선택할 수밖에 없었다.

함께 기숙하게 된 사람들은 전라도와 강원도에서 올라 온 사람들인데 한양 올 때 배에서 만났던 김 선달과 같이 공부에는 별로 마음에 없는 듯 했다.

 옆방에도 지방에서 올라온 과거 준비생들이 짐을 풀고 밤낮으로 책을 읽으며 과거준비에 전념하고 있었다. 지방에서 올라온 집안의 자제 중 여유가 있는 과거준비생들은 괜찮은 시설이나 좀 더 나은 주막에 기거하면서 시험 준비를 하였다.

또한 한양에 친인척이나 연줄이 있는 과거 준비생들은 친인척 집에 머물면서 좀 더 편안하게 시험에 전념할 수 있었다.

 지방에서 올라 온 어떤 과거 준비생은 처음부터 시험에 뜻이 없거나 부모형제의 강요에 할 수 없이 한양에 올라와 엉뚱한 짓을 하고 있었다.

그들은 끼리끼리 모여 대낮부터 주막에서 술을 퍼마시며 소일하거나 기루(妓樓)에 파묻혀 노잣돈을 탕진하기도 했다.

또 어떤 부류들은 놀음에 빠져 노잣돈을 모두 잃고 거지가 되어 오도 가도 못하는 딱한 신세가 되기도 하였다.

한양에는 지방에서 올라 온 과거 준비생을 노리는 협잡꾼들이나 사기꾼들도 주막에 진을 앉아서 어수룩한 지방 유생들의 주머니를 노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