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둠이 내리고 나서야 금봉이는 간신히 집으로 돌아왔다. 비를 흠뻑 맞고 금봉이 집으로 돌아오자 금봉이 아버지와 어머니는 한숨을 쉬었다.

금봉이 아버지와 어머니는 마음이 싱숭생숭하여 들에도 나가지 않고 하루 종일 집에 있었다. 사위를 혼자서 먼 길 떠나도록 한 것 같아서 금봉이 아버지는 울적한 심사를 술로 달래고 있었다.

 “금봉아, 박도령은 잘 갔니? 비를 흠뻑 맞았구나. 찬비를 맞아 몸에 탈이라도 나면 어쩌려고?”

 “아버지. 괜찮아요. 박달 도령님은 잘 가셨어요. 너무 걱정하지 마셔요. 지금 이삼 십리쯤 가시고 계실 거예요.” 금봉이는 퉁퉁 부은 눈으로 간신히 대답하였다.

 “얘야, 금봉아, 너 이리 와서 앉아봐라.” 툇마루에 앉아 있던 금봉이 어머니는 두 눈이 퉁퉁 부운 딸을 불렀다.

 “너, 솔직히 말해보렴. 너, 박달 도령과 어떤 사이니?”

 “어머니......” 갑작스러운 어머니의 질문에 금봉이는 입에 손가락을 물고 주저주저 하며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금봉이 어머니는 두 사람 사이에 일어난 일을 모두 알고 있는 것처럼 딸을 재촉하였다.

 “괜찮아. 엄마가 가만히 보니 너와 그 도령이 보통 사이가 아닌 것 같은데. 어디까지 간 거야?”

 “어머니......”

금봉이 방에서 술을 마시고 있는 아버지를 흘낏 한번 쳐다보더니 고개를 푹 숙였다. 금봉이 아버지는 모녀의 이야기를 듣고 모른 체하며 자작을 하며 북녘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아버지는 술에 취해 아무것도 모르고 있느니 엄마한테 말해봐. 너하고 그 박달 도령하고 어떤 일이 있었던 게야?”

 “어머니, 아무 일도, 아무 일도 없었어요.” 금봉이 한참 만에 겨우 한마디 하였지만 개운하지 않은 듯 했다.
 “그 도령과 아무 일도 없다 던 애가 잠도 안자고 그렇게 지극정성으로 천지신명에게 지성을 드렸니? 내가 보기에는 너와 그 도령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던 게 분명해. 이것아, 엄마에게 못할 말이 어디 있어. 다른 사람에게는 몰라도 이 엄마한테는 말해야지.”

 ‘아아, 어머니가 다 보셨구나. 이일을 어쩌나?’ 금봉이는 갑자기 얼굴이 빨개지면서 어쩔 줄 몰라 했다.

 “너와 그 도령이 밤에 같이 다니는 것을 동네 사람들이 본 모양이야 이것아. 사람들 눈이 얼마나 무서운데 그 도령을 데리고 함부로 동네를 돌아다닌 거야 그래?”

 “어머니, 박달 도령님과 두 번 바람 쐬러 개울가에 다녀왔을 뿐이에요. 도령님과 아무 일도 없었어요. 정말이에요. 동네 사람들이 괜히 샘이 나니까 한 말일 거예요.”

 “네가 밤에 그런 행동을 하니까 그 도령과 눈이 맞았다는 둥 정분이 났다는 둥 내 귀에까지 이상한 소문이 들리는 거야.”

 “누가 그런 소문을 냈대요?”

 “이미 소문이 동네에 파다하게 퍼졌는데 누가 말한 게 뭐가 중요하니?”

 “어머니, 아무 일도 없었어요.”

 “정말이야? 정말 아무 일도 없던 게 분명한 거니?”

 “네에 -” 금봉이는 기어들어가는 소리로 간신히 대답하고 눈물을 떨어뜨렸다. 얼굴이 파랗게 변하면서 으슬으슬 떨었다.

“얘, 왜 눈물을 흘리는 거니? 어디 아파서 그러니?”

 “아니에요. 비를 맞고 와서 그런지 마음도 아파요.”

 “괜히 마음이 왜 아파?”

 “저도 모르겠어요.”

 ‘어이구, 저것이 무슨 일을 낸 게 분명하구나. 장차 이일을 어찌하면 좋단 말인가? 뭐라도 잘못되는 날이면 우리 집안은 망신살이 뻗칠 텐데......’

금봉이 어머니는 긴 한숨을 내쉬면서 마음이 착해 과객을 스스럼없이 재워주는 남편의 처사가 얄미웠다. 옆에서 술잔을 기울이는 남편을 쳐다보았지만 금봉이 아버지는 먼 하늘만 바라보며 눈만 껌뻑거릴 뿐이었다.

 “금봉아, 넌 내 딸이기 때문에 이 엄마는 그 도령과 너와 어떤 일이 있었는지 알아야 해. 그러니 안심하고 자세히 말해보렴. 난 네가 이제껏 한 번도 남자들에게 서방님이라고 말하는 것을 들어 본적이 없었는데 내 언뜻 들으니 그 박달도령에게 서방님이라고 부르는 것 같던데?”

 “어머니......”

 “괜찮아, 어미와 딸 사이에 못할 말이 어디 있니? 금봉아, 속 시원하게 말해보렴. 그 박달도령과 어떤 일이 있었던 거니?”

 “어머니, 정말 아무 일도......”

 “이것아, 너는 여자야. 여자는 함부로 몸을 놀리면 어떻게 되는지 몰라서 그러니?”

 “어머니, 정말 아무 일도 없었어요. 그리고 마땅히 부를 호칭이 없어서 그냥 듣기 좋으라고 그렇게 불렀었던 거예요.”

 ‘아, 애가 지금 나에게 거짓말을 하는 게 틀림없어. 내 눈을 똑바로 바라보지 못하는 것을 보면 분명히 그 도령과 무슨 일이 있었던 게 분명해.’

 “그래, 네가 아무 일 없었다고 하니 나도 그리 믿겠다. 그러나 여자의 행동은 곧 표시가 나타난단다.”

 ‘표시? 표시가 무엇일까?’ 금봉이는 어머니의 말뜻을 금방 알아듣지 못하고 손가락만 물어뜯고 있었다.

 “피곤할 테니 그만 저녁 들고 쉬어라.”

간신히 어머니의 날카로운 질문 공세를 피한 금봉이는 혼자 늦은 점심을 들면서 지금 쯤 박달 도령이 어디 쯤 갔을지 궁금했다. 이미 날이 어두워지기 시작하였으니 많은 들판을 산을 넘어 상당한 거리에 있을 어느 주막에 들어 있을 것 같았다.

금봉이와 헤어진 박달은 하루 반나절을 부리나케 걸어 산척을 지나 목계(牧溪) 나루터에서 한양가는 배를 탔다.

자주 있는 배가 아니지만 박달 도령이 탄 배는 충주와 여주를 통과하여 양평의 두물머리를 지나 한양의 마포나루까지 갈 참이었다.

박달 도령은 배로 가면 족히 십여일 내로 한양에 도착 할 수 있을 거라고 예상하였다. 걸어가는 것 보다 훨씬 편하고 안전할 거라고 길 떠나기 전에 스승이 한 말이 생각났다.

 '아아, 서방님께서 무사하실 테지. 서방님과 헤어진 지 이제 하루도 안 되었건만 왜 이리 내 가슴이 아플까? 그리고 좀 전에 어머니께서 하신 말씀이 무슨 뜻일까? 여자의 행동은 곧 표시가 나타난다? 여자의 행동이라? 그게 무슨 뜻일까?‘

금봉이는 어머니의 말을 이리 저리 생각해보아도 도무지 무슨 뜻인지 알 수 없었다.

  헤어질 때 눈물이 어린 박달 도령의 모습에 금봉이는 가슴이 아려왔다.

분명히 헤어지기 싫어하는 박달 도령의 얼굴에서 금봉이는 이별을 아쉬워 하는 박달 도령의 심정을 읽을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잠이 오지 않아 전전반측하며 금봉이는 박달 도령의 잘생긴 얼굴을 떠올렸다.

금봉이는 아버지, 어머니의 신경을 건드리지 않기 위하여 방안에 정화수를 떠다 놓고 다시 빌기 시작하였다.

 “천지신명이시여, 박달 서방님이 무사히 한양에 도착할 수 있도록 도와주소서. 소녀, 이렇게 빌고 있나이다. 우리 박달 서방님이 무사히 한양에 도착하여 과거에 장원급제하면 모든 공덕을 천지신명님께 돌리겠습니다. 비나이다. 비나이다. 천지신명님께 비나이다. 우리 박달 서방님이 무사히 한양에 도착하도록 도우소서! 비나이다. 비나이다. 강을 건너면 행여 강에 빠지지 않도록 하시옵고, 산을 넘을 때 산짐승에게 해를 당하지 않도록 보호해 주시옵고, 이상한 여인들이 박달 서방님을 유혹하려 들면 그들의 붉은 입술을 멀리하게 도와 주시옵고, 천둥 번개가 치는 날이면 고요를 주시어 박달 서방님이 편안히 공부에 전념할 수 있도록 도와 주시옵고, 하루 세끼 따뜻한 밥을 드실 수 있도록 도와 주시옵고, 항상 총기를 맑게 하여 공부가 머릿속에 쏙쏙 들어가도록 주와 주시옵고, 행여 여인이 생각나면 오로지 이 소녀만을 생각할 수 있도록 도와 주시옵고, 과거볼 때 시험과제를 보면 훌륭한 정답을 쓸 수 있도록 도와주소서. 이 소녀, 이렇게 천지신명님께 빌고 또 비옵나이다.“

 금봉이 는 밤이 이슥토록 천지신명에게 빌고 빌었다.

 “이보시오 도령, 보아하니 과거를 보러가는 듯 하외다?”

박달 도령을 목계나루터에서 배를 탈 때부터 관심을 가지고 봐오던 선비였다.

 “네에. 그렇습니다. 선달님께서도 과거 보러 가시는지요?”

 “나도 과거를 보러가는 중이오. 반갑소. 우리 통성명이나 하고 지냅시다. 나는 청풍에 사는 김청이라하오.”

 “박달이라 합니다.”

김청이 먼저 손을 내밀자 박달 도령도 얼른 손을 내밀어 악수를 하였다. 김청이라는 사내는 곱상하게 생기기는 하였지만 어딘가 모르게 세상의 때가 많이 묻은 듯 했다. 나이는 박달 도령보다 서너 살 위로 보였다.

 “선달님, 저는 이 뱃길이 처음입니다. 한양까지 얼마나 걸리는지요?”

 “글쎄요. 이 배는 정기적으로 다니는 배가 나이라서 나도 정확히는 모르오. 한 열흘정도 걸리지 않을까 합니다. 만약 동남풍이 솔솔 풀어주면 더 빨리 도착할 수도 있겠지요.”

앞뒤로 황포 돛대가 설치된 평저선(平底船)에는 사오십 명이 타도 족히 될 듯 커보였다.

배는 복층으로 되어 있어서 내부에는 밤에 잠을 잘 수 있는 공간이 있었지만 협소해 보였다.

갑판에는 옹기며 대나무로 만든 생활용품들과 추수한 농산물이 가득 실려 있었다. 낮에는 햇볕을 피해 포장 아래 앉아 비스듬히 눕거나 그림처럼 펼쳐진 산수화 같은 산천을 구경하는 일이 고작이었다.

배에는 뱃일을 하는 사람 서너 명 하고 상인, 농민, 선비 등 삼십 여명 정도가 타고 있었다. 도포를 정제하고 갓을 쓴 사람은 박달 도령과 김청 두 사람 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