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니오. 내가 만약 장원급제하여 고향에 내려가면 어차피 지나가야 하는 길이니 먼저 그대에게 들려야하겠지요. 그것이 도리일 것 같고, 또한 잠시나마 나를 보살펴준 그대와 어르신들에게 감사의 인사를 드려야지요.”

 “고마워요. 도령님.”

금봉낭자는 박달 도령의 말에 콧날이 찡긋하면서 금방이라도 울먹일 것 같았다. 박달 도령의 말이 그렇게 고마울 수가 없었다.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한 번도 느껴보지 못한 감정이었다.

 “그때는 꼭 그대를 함께 데리고 고향으로 내려 갈 것이오. 내려가서 어머님께 그대와 그대 아버지의 은혜를 말씀드리고 그대와 혼례를 올릴 것이오.”

“도령님-”

 “금봉이, 업혀요. 다리가 아픈 것 같은데 내 업어 줄 테니......”

박달 도령은 금봉낭자를 업어주겠다고 등을 내밀고 앉자 금봉낭자는 손사래를 쳤다.

 “아니에요. 그러다 지나가는 사람들이 보면 어찌 하려고요. 도령님, 그냥 내려가요. 저 다리도 아프지 않은데요. 누가 보면 어찌하려고요?”

“그대가 예쁘고 사랑스러워서 그러는 것이니 어서 업혀요. 이 산중에 누가 봐요? 어서요.”

 “아이, 그러다 누가 보면 어쩌려고......”

금봉낭자는 박달 도령의 강요에 의해 어쩔 수 없이 박달 도령의 등에 업혔다. 단단하고 너럭바위 같은 박달 도령의 등에 업힌 금봉낭자는 날아갈 듯 기분이 좋았다. 어릴 적 아버지에게 업혀보기는 했지만 아버지 말고 다른 남자의 등에 업혀보기는 처음이었다.

 “어때요?”

“도령님, 너무 좋아요. 도령님 등이 너럭바위처럼 넓고 든든해서 너무 좋아요.”

“그럼, 벌말까지 업고 갈게요.”

“안돼요. 마을사람들 눈에 띄면 큰일 나요.”

“큰일 나라면 나라지요. 하하하하......”

금봉낭자의 엉덩이에서 전해지는 온기가 박달도령의 손을 타고 가슴으로 전해졌다.

성숙한 여인의 육감에 박달 도령은 기분이 묘했다. 지금까지 그 어떤 여인을 업어 본적이 없는 박달 도령이었다. 생각보다 금봉낭자는 무겁지 않았다. 

 ‘아아, 도령님, 이 순간 소녀는 죽어도 여한이 없을 것 같습니다. 이렇게 영원히 도령님 등에 업혀 가고 싶어요. 아무도 없는 그런 곳으로 가서 천년만년 살고 싶어요. 그러나 곧 따나가실 도령님을 생각하면 소녀 눈앞이 캄캄하옵니다. 도령님, 소녀는 이제 어찌해야 하는지요?'

 흑-.

금봉낭자 박달이 등에 업힌 채 어깨를 가늘게 떨었다.

금봉낭자가 흐느끼는 것을 눈치 챈 박달 도령은 묵묵히 걸으며 금봉낭자 감정이 정리되기를 기다려 주었다.

금봉낭자의 흐느낌을 가슴으로 들으면서 박달 도령은 천천히 산길을 걸었다.

 “금봉이, 내일, 내일 한양으로 떠나야 하겠소. 내 말 듣는 게요? 과거 볼 날이 얼마 남지 않았어요. 이곳에서 더 지체하다가는 과거를 보지 못할 것 같소. 집에 가거든 아버님과 어머님에게 말씀드려줘요. 내일 아침 일찍 떠난다고요.”

 “도령님, 더 있다 가시면 안 돼요? 저는 그럼 어찌하라고요. 며칠만, 며칠만 더 있다 가시면 안돼요?”

박달 도령의 등에 업혀 흐느끼던 금봉낭자가 간신히 입을 열었다.

 “안돼요. 그러다가 시험날짜에 맞추지 못하면 지난 십년간의 정성이 하루아침에 물거품이 되고 말거요. 길어야 삼 개월이니 그때 까지만 기다려요.”

 으흐흑 -.

금봉낭자는 좀 전보다 더욱 서럽게 흐느꼈다.

어깨의 들썩거림이 박달 도령에게 전해지고 있었다.

 “울지 마오. 만나면 이별을 해야 하고 이별이 있으면 또 다시 만나는 것이 인지상정이오. 그러니 내가 떠나더라도 울지 마오. 과거에 합격하면 제일 먼저 그대를 찾아온다고 하지 않았소. 그러니 울지 말아요. 다 큰 사람이 울면 어떻게 해요?”

 “도령님이 보고 싶어서 저는 매일 울 것 같아요. 내가 왜 이러는지 모르겠어요. 이렇게 도령님 등에 업혀있는 데도 눈물이 나는걸요.”

금봉낭자는 흐르는 눈물을 닦으며 간신히 속삭였다.

 “바보 울기는......”

박달 도령이 금봉낭자의 엉덩이를 살짝 꼬집었다.

마을에 가까이 와서 박달 도령은 금봉낭자를 내려 주었다.

혹시 마을 사람들에게 들키면 민망한 일이 되어 금방 동네에 이상한 소문으로 번질 것이 뻔했다.

집에 온 금봉낭자는 아버지가 들어서 돌아오자 박달 도령의 이야기를 전했다.

금봉낭자 아버지는 마음이 무거웠다. 분명 딸아이와 마음속으로 순정을 주고받았다고 어렴풋이 짐작하고 있던 금봉낭자의 아버지였다. 막상 박달 도령이 떠난다고 하니까 섭섭한 마음 금할 길이 없었다.

 금봉낭자 아버지는 이왕 떠나가야 할 사람이니 홀가분하게 떠날 수 있도록 해야 한다고 생각하고 아쉬운 감정을 진정시켰다. 금봉낭자 아버지는 내일 아침 일찍 한양으로 떠나기 전에 음식을 푸짐하게 차려 대접을 하고 싶었다.

금봉낭자 아버지 손수 닭을 잡고 금봉낭자 어머니에게 떡을 만들도록 하여 저녁상을 준비시켰다. 과거보러 가는 사람에 대한 최대한의 예의를 보여주고 싶었다. 비록 짧은 기간이지만 금봉낭자 아버지는 박달을 사위처럼 생각하고 있었다.

 “자, 박도령, 한잔 드시게.”

“어르신, 고맙습니다. 이 은혜를 어찌 다 갚아야 할지요?”

박달 도령은 잔을 들어 건배를 권하는 금봉낭자 아버지에게 미안해하였다. 

 “허허허허……. 내 집에 찾아 든 손님이오. 손님을 잘 대접해 보내는 것은 조상 때부터 큰 미덕으로 여기고 있소. 우리 집에 머무는 동안 불편한 점이 있었다면 이해하시구려. 워낙 산촌이라 궁색한 살림이다보니.”

“아, 아닙니다. 전혀 불편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저 때문에 밤잠도 제대로 못 주무셨을 텐데요.” 

 “아니오. 이 산촌에 언제 또 도령의 낭랑한 글 읽는 소리를 들어 볼 수 있을지......”

금봉낭자 아버지 얼굴에 아쉬움이 잔뜩 묻어 있었다.

 “어르신, 송구하고 또 감사합니다. 이 은혜는 꼭 갚겠습니다.”

“은혜는 무슨. 자자, 내 술 한잔 받아요.”

“고맙습니다. 어르신.”

금봉낭자 아버지는 박달 도령을 사위같이 대접하면서 꼭 과거에 합격하기를 마음속으로 염원하였다.

그리고 자신의 딸이 마음에 드는지 넌지시 떠보고 싶기도 했다. 며칠 동안 자신의 집에 머물고 있는 동안 금봉낭자 아버지는 딸의 행동을 예의 주시하면서 박달 도령과의 관계를 살펴보았다.

 두 사람이 은연중 서로의 시선을 주고받고 있다는 것을 파악한 금봉남자 아버지는 딸과 박달 도령이 은밀한 사이가 되기를 기대했었다.

 “우리 딸애가 도령에게 뒷바라지를 잘 해드렸는지요?”

 “두 분 어르신뿐만 아니라 따님이 너무 세세한 데 까지 신경을 써주셔서 제가 어찌할 바를 모르겠습니다. 정말로 고향의 집에 있는 것처럼 마음이 편했습니다. 이 모두가 어르신께서 베풀어 주신 은혜입니다.”

“허허허허......, 그저 우리 집에 머무는 동안 마음 편히 있었다니 다행입니다. 부디 한양에 가시거든 좋은 결과가 있기를 바래요.”

“아닙니다. 정말입니다. 마치 총각인 제가 장가를 들어 부인에게 수발을 받는 듯한 착각이 들 정도였습니다.”

금봉낭자 아버지는 박달 도령의 말에 기분이 좋아 입이 벌어졌다. 방금 마신 술로 금봉낭자 아버지는 얼굴이 벌겋게 달아올랐다.

 “금봉아, 그 동안 박달 도령을 뒷바라지 하느라 고생했다. 이리 와서 박도령에게 술 한 잔 따르거라.”

한 번도 손님에게 술을 따르도록 시킨 적이 없는 금봉낭자 아버지였다. 금지옥엽의 딸에게 손수 술을 따르도록 한 것은 큰 파격이었다. 금봉낭자는 아버지의 명을 거역하지 못하고 주춤거릴 뿐이었다.

 “아닙니다. 어르신, 아닙니다.”

박달 도령이 괜찮다고 하였지만 금봉낭자 아버지는 일부러 박달 도령에게 술을 따르도록 하였다. 하지만 생전 술을 따라 본적이 없는 금봉낭자는 어떻게 할지 몰라 머뭇거리고 있었다.

 “허허, 괜찮습니다. 얘야, 뭐하니? 내일이면 떠나실 분인데......”

박달 도령의 술잔에 술을 따르는 금봉낭자의 손이 바르르 떨렸다. 그 순간을 금봉낭자 아버지는 놓치지 않고 두 사람의 얼굴을 살폈다. 술잔에 술이 넘치고 있었다.

 ‘음, 이 애가 박달 도령하고 무슨 깊은 이야기라도 나눈 모양이구나. 생전 술을 따라 본적이 없는 아이인데’

금봉낭자 아버지는 속으로 흡족해 하면서 딸의 얼굴을 자세히 바라보았다. 박달 도령의 잔에 술을 따르는 금봉낭자의 얼굴이 빨갛게 상기되어 있었다. 금봉낭자 아버지는 그런 딸의 행동에 두 사람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이 틀림없다고 생각하였다.

 “박달 도령님, 한양에 가시면 부디 몸조심하시고 꼭 과거에 합격하시어 금의환향 하세요. 소녀, 도령님이 떠나가신 후에도 일심으로 도령님의 장원급제를 위하여 기도드리겠습니다.”

금봉낭자는 얼굴을 푹 숙인 채 간신히 한마디 하였다. 목소리가 떨리고 있었다. 하룻밤 지나면 기나긴 이별을 맞이해야 하는 심정에 금봉낭자의 눈가는  촉촉이 젖고 있었다.

 “고, 고마워요. 금봉 낭자. 내, 이 은혜는 죽어도 잊지 않겠습니다.”

박달 도령은 고개를 푹 숙인 채 마음속으로 흐느끼는 금봉낭자를 꼭 안고 다독거려 주고 싶었으나 어른들 앞이라 차마 어떤 행동도 할 수 없었다.

 “박달 도령, 장원급제하시고 고향 가시는 길에 이 마을 지나가야 할 테니 시간이 허락된다면 우리 집에 한번 들려주신다면 더할 나위 없는 영광이겠습니다.”

술잔을 비우며 금봉낭자 아버지가 섭섭한 감정을 토했다.

 “어르신, 당연히 들려서 그간의 고마움에 보답을 드려야지요.”

 “도령께서 그리 말씀해 주시니 고맙습니다. 그리고 내 딸, 아, 아니오.”

술이 어량해진 금봉낭자 아버지는 금봉낭자에 대하여 무슨 말을 하려다 그만 두었다. 곁에 있던 금봉낭자 어머니의 눈이 빛났다.

두 남자가 주거니 받거니 하면서 늦게 까지 술잔을 기울였다. 저녁상을 물린 박달 도령은 사랑채로 들어 금봉낭자에게 내일 아침 떠나기 전에 전해 줄 편지를 썼다.

   보세요.
   전생에 나와 그대는 인연이 있었나 봅니다. 생면부지의 나를 이렇듯 따뜻하게 대해준 그대와 그대 부모님의 은혜는 내 죽을 때 까지 잊지 못할 겁니다. 그대와 나눈 사랑은 절대 불장난이 아니오. 내 누누이 말했듯 과거에 합격하면 제일 먼저 벌말로 달려와 그대와 기쁨을 함께 할 것입니다. 내가 떠나더라도 절대로 슬퍼하거나 마음 상하지 않도록 각별히 몸조심해야 합니다. 이별은 곧 있을 만남을 위한 준비를 하는 일이라고 생각 하면 됩니다. 과거에 합격하고 늦어도 삼 개월 안으로 다시 그대를 찾아 올 테니 절대로 낙심하거나 마음을 조급하게 먹으면 안 됩니다. 나도 그대가 많이 보고 싶을 것 같습니다.
 
                                                                                                                  - 박달 -
  
 박달 도령은 편지를 곱게 접에 머리맡에 두고 잠을 청하였지만 잠이 오지 않았다. 보름달 같은 금봉낭자의 얼굴, 도톰한 입술, 금방이라도 빠져들 것 같은 깊은 산속 옹달샘 같은 눈동자…….

박달 도령은 몰래 금봉낭자를 불러내 한 걸음에 물레방앗간으로 달려가고 싶었다.

 금봉낭자 역시 내일 날이 밝으면 떠날 박달 도령 생각에 잠을 이루지 못하고 뒤척였다. 금봉낭자는 자리에서 일어나 이등령에서 가져온 밤을 쪄서 사랑채로 가져갔다.

자신의 방에 돌아와 누웠지만 밤이 깊어질수록 정신은 더욱 또렷해 졌다. 자리에서 일어난 금봉낭자는 장독대로 가서 정화수 한 그릇을 장독에 올려놓았다.

그믐달이 서천을 향해 조용히 흐르고 멀리서 산짐승 우는 소리가 심란한 금봉낭자의 가슴을 갈가리 찢어 놓았다.

집 바로 뒤 동산에서 부엉이가 짝을 찾는 소리가 들렸다. 금봉낭자는 그만 눈물을 떨어뜨리며 흐느꼈다. 잠시 후 정신을 가다듬은 금봉낭자는 합장하고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비나이다. 비나이다. 천지신명님께 비나이다. 우리 박달 도령님께서 과거에 장원 급제할 수 있도록 굽어 살피소서. 우리 도령님이 과거에 꼭 합격하도록 도와주소서. 비나이다. 달님, 달님, 우리 도령님, 꼭 장원급제하도록 도와주세요. 소녀, 이렇게 빕니다. 우리 박달 도령님이 꼭 과거에 장원급제할 수 있도록 도와주세요. 도령님께서 과거에 합격하셔야 하옵니다. 도령님이 입신양명하시고 또한 제가 도령님과 함께 백년해로 할 수 있도록 도와주세요. 이렇게 빌고 비나이다. 도와주세요.”

금봉낭자는 달을 향해 정성을 다해 빌고 또 빌었다. 밤이슬이 뽀얗게 내려 금봉낭자 머리와 이마를 은빛으로 촉촉이 적셨다.

  - 계속 -

* 본 소설은 충북 제천시 백운면 “박달재”에 전해내려 오는 박달도령과 금봉낭자의 사랑 이야기입니다. 많은 관심과 사랑 부탁드립니다. 지난 이야기는 본지의 홈페이지 http://www.jcnews.co.kr 에서 다시 보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