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령님, 그 이야기 말고 소녀가 알고 있는 또 다른 슬픈 이야기를 들려드릴까요?”

“또 다른 슬픈 이야기?”

 “네에.”

“이왕이면 즐거운 이야기가 듣기 좋을 텐데......”

“이상하게 이 고개에는 즐거운 이야기보다 슬픈 전설이 얽혀있어서 저도 마음이 아파요. 도령님, 수양대군에 대하여 잘 아세요?”

 “잘 알지. 그 분은 비록 조선의 왕을 지낸 분이지만 욕심이 너무 많은 분이셨어. 세종임금의 아들로 태어나 그 분의 형님이신 문종대왕이 일찍 승하하시자 어린 노산군이 왕위를 물려받게 되지. 그런데 야심가였던 수양은 어린 왕을 좌우에서 보필하던 중신인 황보인과 김종서를 죽이고 권력을 잡고 얼마 후에는 상감을 상왕이라는 구실로 물러나게 한 뒤 자신이 임금의 자리에 앉지. 그렇게 있었으면 좋겠지만 얼마 안 되어 상왕을 복위시키려는 사건이 벌어지지. 성삼문, 박팽년 등 사육신이라 분들이 상왕을 다시 옹위하려다 발각되어 삼족이 멸하는 참극이 벌어지게 되었어. 그러자 수양대군은 상왕이었던 노산군을 강원도 영원 청령포로 귀양 보내 그곳에서 죽이는데 그때 그 상왕이었던 비련의 노산군이 죄인이 되어 강원도 영월로 유배될 때 이 고개를 넘었다고 알고 있어.”

박달 도령은 마치 어제 일어난 일을 이야기 하듯 말하였다.

 “어머나, 도령님. 과거 공부만 하신 게 아닌가봐요? 역사에 대해서도 너무 많이 아세요. 공자님과 맹자님만 아시는 줄 알았어요. 호호 호호호......”

금봉낭자는 자세히 알지 못했던 이등령에 대한 전설을 박달 도령을 통하여 듣자 감격해 했다.

 “한번 들어 보려오?”

박달 도령은 목청을 가다듬고 지그시 눈을 감았다.
 
  천만리 머나먼 길에 고운 님 여의옵고
  내 마음 둘 데 없어 냇가에 앉았으니
  저 물도 내 안 같아야 울어 밤길 예놋다.

 “어머나, 도령님. 그 시는 저도 얼핏 들은 기억이 나요.”

 “이 시는 그 당시 의금부도사였던 왕방연(王邦衍)이 상감인 수양대군의 명에 따라 영월 청령포에 있던 노산군에게 사약을 내려 죽게 하고 돌아오는 길에 참담한 심정을 읊은 시랍니다. 지금 생각해봐도 그분은 너무 억울하게 돌아가셨어요.”

 “도령님, 경순왕, 노산군. 두 분 왕과 많은 신하들은 이 고개를 넘으면서 무슨 생각을 하였을까요? 괜히 마음이 우울하고 무거워요.”

 “너무 우울해 할 필요 없어요. 이미 다 지나간 전설들인데요.”

 “그래도. 소녀의 마음은 몹시 아프답니다. 앞으로는 이 고개에 그런 슬픈 이야기가  만들어지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우리가 그런 이야기 말고 아름답고 지고지순한 사랑 이야기를 만들면 되잖아요.”

 ‘사랑 이야기?’

박달 도령은 금봉낭자의 손을 살며시 잡으며 시선을 맞추었다.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예쁘고 사랑스러운 여인이었다. 자신이 한양으로 과거를 보러가는 처지를 잊은 박달 도령은 금봉낭자에게서 잠시도 시선을 떼지 못했다.

 “도, 도령님. 왜 그러셔요? 제 얼굴에 뭐가 묻었어요?”

 “아, 아니오. 그대가 너무 사랑스러워서 그래요. 내 영원히 그대를 잊지 않을 거요. 그대와 기이한 인연을 맺게 해주신 천지신명님에게 고맙게 생각하고 있었어요.”

 “도령님, 그 말씀 소녀 가슴에도 깊이 새겨도 되는 거죠?”

 “그, 그럼. 되고말고. 그대뿐만 아니라 이 산의 산신령님께서도 오늘 나와 그대가 나눈 모든 이야기를 다 아시고 계실 거요. 또한 하늘도 알고 저 하늘을 나는 산새들도 다 들어 알고 있을 거요.”

박달 도령은 손가락으로 하늘과 시랑산 꼭대기를 가리키며 하얀 치아를 드러내 놓고 미소를 지어 보였다.

 “도령님, 소녀는 지금 이 순간이 꿈을 꾸고 있는 것만 같아요. 믿기지가 않아요. 이 순간이 영원히 이어졌으면 얼마나 좋을까요?” “곧 그리 될 거요. 내 한양가서 과거에 합격하면 그대에게 달려오면 그 순간부터 정말로 꿈같은 일이 펼쳐질 거요. 나를 믿지요?”

박달 도령은 금봉낭자의 섬섬옥수(纖纖玉手) 들어 자신의 뺨에 대고 비볐다. 이등령 정상에 간간히 바람이 불었다.

그때 마다 주변의 나무들이 흔들리면서 형형색색 물든 나뭇잎들이 바람을 타고 소풍을 떠나기도 하고 하늘 높이 솟구쳐 오르다가 빙글빙글 돌면서 떨어지기도 하였다.

 “도령님, 우리 산에 올라가요.”

“산에?”

 “네에. 산에 가서 도토리랑, 밤을 따서 맛보면 재미있을 거예요.”

 “그래? 그럴까 그럼.”

금봉낭자와 박달 도령은 좁은 산길을 오르기 시작하였다.

박달 도령이 금봉낭자의 손을 잡아주며 앞장서서 산에 올랐다. 시원한 바람이 고개에 있을 때보다 더욱 세게 불었다. 두 사람의 이마에 송알송알 맺혀있던 땀방울이 금방 식으면서 시원함을 주었다.

 “도령님, 저기 좀 보세요. 저기 밤나무에 밤이 탐스럽네요.”

 “이곳에 있는 밤은 누가 따가지 않나봐?”

“나무꾼들이 가끔 와서 따가기는 하는데 마을 주변에 널리게 밤나무라서 다람쥐들이나 겨우내 먹을 식량으로 따갈거에요. 이 산에 있는 도토리와 밤은 다람쥐나 청설모가 주인이에요. 오늘은 소녀와 도령님이 주인이 되고요. 호호호호......”

금봉낭자는 기분이 좋아져서 소녀처럼 웃었다.

 “그럼, 우리도 다람쥐네. 하하하하…….”

박달 도령이 밤나무에 올라 긴장대로 쫙 벌어진 밤송이를 툭툭 치자 밤이 후드득 땅에 떨어졌다. 서너 그루의 밤나무에 올라 밤을 따자 금방 밤이 금봉낭자의 치맛자락에 한가득 담겼다.

 “도령님, 이제 그만하세요. 이 밤을 가지고 내려가서 까서 맛봐요.”

 “나도 고향에 있을 때 동네 친구들과 산에 올라 밤을 까서 맛보곤 했었지. 그때가 벌써 십년도 더 되었을 거야. 그 친구들은 요즘도 산에 올라 더덕이랑 도토리 채취하느라 정신이 없을 텐데......”

박달 도령은 남녘 하늘을 바라보며 잠시 고향 생각에 잠겼다. 박달 도령이 하얀 들국화 한 송이를 금봉낭자 머리에 꽂아주었다.

“정말로 예쁘다.”

“정말로요?”

 “그럼, 정말이고말고.”

 “도령님이 괜히 소녀를 놀리시는 거 아니지요?”

다시 이등령으로 내려 온 두 사람은 밤 껍질을 까면서 서로의 입에 넣어 주기도 했다.

 “이야, 밤이 달착지근하면서도 고소한데. 이등령 밤이라 그런가?”

“호호 호호호. 도령님 고향에서 나는 밤보다 맛있어요?” “응, 아주 맛있어. 찌거나 구워서 먹으면 더 맛있을 거 같은데......”

“도령님, 그럼 먹고 남은 밤은 가져가서 소녀가 밤에 삶아서 사랑채로 가져갈게요. 늦은 밤까지 공부하시려면 출출하시잖아요. 밤참으로 드시면 괜찮을 거예요.”

 “오늘밤은 그대 덕분에 밤참을 다 맛보게 되네. 하하 하하하......”

두 사람이 밤을 까서 맛보며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있었다. 산촌이고 늦가을이라 낮 시간이 짧았다.

 “도령님, 고향 이야기 좀 해주셔요.”

“응? 내 고향 이야기?”

“네에. 재미있는 이야기가 참 많을 거 같은데?”

“가만있자. 재미난 이야기가 뭐가 있을까? 난 매일 서당과 집만 왔다 갔다 해서 재미난 이야기가 별로 없는데. 어쩌나?” “일 년 내내 공부만 하셨어요?”

 “그래, 그 이야기 재미있겠다.”

금봉낭자는 박달 도령이 무슨 재미난 이야기가 생각난 듯 박수를 치자 몹시 궁금해 했다.

 “내가 살던 마을에서 실제 일어났던 이야기인데. 들어봐요 그럼. 우리 마을에 한 과수댁이 시어머니와 함께 살고 있었지. 그 집안은 부유한 편이었어. 그 과수댁은 혼인한 지 일 년도 안 돼 남편이 무슨 이유인지 몰라도 그만 세상을 떠나고 말았어. 그런데 그 과수댁 얼굴이 반반해 동네는 물론 근동에 까지 소문이 났지. 비록 유부녀지만 동네 사내들은 유부남이나 총각들 할 거 없이 그 과수댁이 지나가면 넋을 잃고 쳐다보곤 했었어. 시어머니는 젊은 며느리가 혹시 외간 남정네들의 손을 탈까봐서 밤마다 며느리 방 앞을 지키곤 했고. 그 시어머니도 과부로 엄청 열정이 많은 여인이었어. 나이도 그리 많지 않았거든. 그런데 아무리 시어머니라도 밤이 깊으면 졸리게 마련이지. 하루 이틀도 아니고 매일같이 무슨 수로 시어머니가 며느리 방문 앞에서 감시를 할 수 있겠어.
 그런데 어느 날은 아침 일찍 며느리가 있는 방을 가다가 마당에 이상한 발자국을 발견한 거야. 그 발자국이 여자의 발자국이 아니라 분명히 남자의 발자국이 분명했어. 시어머니는 처음에는 하인들의 발자국이려니 하고 대수롭지 않게 넘어갔는데 자주 남자의 발자국이 발견되니까 이상한 생각을 하기에 이르렀지. 며느리가 혹시 밤에 남정네를 끌어 들이는 거 아니가 하는 요상한 상상에 빠진 거지. 그래서 하루는 시어머니가 저녁상을 물리면서 며느리에게 오늘은 방을 바꿔서 자자고 했다는 거야.
 며느리는 가슴이 뜨끔하면서도 감히 시어머니의 명령을 거역할 수 없어 시어머니의 요구대로 방을 바꾸어 자기로 하였지. 며느리는 불안해서 잠을 잘 수 없었지.  새벽이 되자 밖에서 이상한 소리가 들린 거야. 시어머니는 이웃집 할아범과 오랜 기간 그렇고 그런 사이였었지. 한 달에 두 번 , 초하룻날과 그믐날 시어머니를 만나 은밀한 관계를 유지 했던 거야. 그런데 그날은 영감이 술에 취해 날짜를 그만 잘못 알았던 거야. 며느리 역시 같은 동네에 사는 젊은 홀아비와 눈이 맞아 이틀이 멀다하고 깊은 밤 정분을 나누곤 했었지.
 밖에서 이상한 소리가 들려 며느리는 용케도 홀아비가 자신이 시어머니 방으로 든 것을 알고 찾아 온 줄 알고 문을 열어 주었다. 그런대 캄캄한 방 안이라 늘 하던 대로 그 일을 하였대나? 그런데 이상한거야 그제만 하더라도 단단한 체구였던 홀아비가 살이 물렁물렁한 거야. 피곤하면 그럴 수도 있다고 생각한 며느리는 가만히 있어대. 다음날 아침 시어머니는 얼굴에 웃음꽃이 피어서 싱글벙글 하더래. 그런 일이 있고 얼마 안 있어 동네에 해괴한 소문이 돈 거야.
 결국 시어머니와 며느리는 외간남자와 사통한 사실이 원님의 귀에 들어가게 되었고 어느 날 밤, 그 요상한 사건이 순라꾼들에게 꼬리가 잡혀 두 남자는 옥살이를 하게 되었고 시어머니와 며느리는 곤장을 맞고 마을에서 쫓겨나게 되었지. 하하 하하하......, 그 일로 인하여 우리 마을 뿐 아니라 인근 동네까지 벌집 쑤셔놓은 것처럼 발칵 뒤집혔었어.“

박달 도령은 그 과수댁과 정분이라도 나눈 것처럼 이야기 하였다.

 “호호 호호호......., 우습기도 하고 슬프기도 한 이야기네요. 남녀칠세부동석이란 말은 다 거짓인가 봐요. 소녀도 이렇게 도령님과 함께 앉아 있으니 말이에요.”

 “우리는 일곱 살 먹은 아이들이 아니잖아.”

박달 도령이 금봉낭자의 볼을 살짝 꼬집었다.

 “그런가요? 호호 호호호......”

 “금봉이, 이제 내려가요. 산바람이 차요. 그리고 여자의 몸으로 혼자 이 곳 까지 올라오는 일도 쉬운 일이 아니오. 나중에 내가 한양으로 떠난 뒤 이곳에 올라와서 나를 그리는 것도 좋은데 너무 자주 오면 건강에 도움이 안 될 거요. 가끔, 아주 가끔 와요. 너무 자주 오다보면 마을 사람들 눈에 이상하게 비쳐질 거요.”

박달 도령은 벌말로 내려오면서도 금봉낭자에게 고향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자신이 공부하느라 어려운 살림에 뒷바라지 하는 고향의 노모 이야기를 금봉낭자에게 들려주자 금봉낭자는 우울해 졌다.

 “도령님께서 장원급제하시면 저보다 고향에 먼저 다녀오세요. 어머님께서 장원급제한 도령님을 보시면 얼마나 좋아하시겠어요.”

  - 계속 -

 본 소설은 충북 제천시 백운면 “박달재”에 전해내려 오는 박달도령과 금봉낭자의 사랑 이야기입니다. 많은 관심과 사랑 부탁드립니다. 지난 이야기는 본지의 홈페이지 http://www.jcnews.co.kr 에서 다시 보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