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9회

 “이대로 천년만년 흘러갔으면 좋겠어요.”

긴 여운을 만끽하면서 금봉낭자는 박달 도령의 가슴에 안겨 행복에 겨워하였다.

 “으응, 나도 그런 생각이 굴뚝같아. 금봉이, 사랑하오.” 

“박달니임 -.”

달이 동산 위로 한참 올랐을 때 사내의 긴 신음소리에 이어 여인의 가냘픈 신음이 이어졌다.

방앗간 안은 뜨거운 열기로 다시 덥혀졌다. 물레방아는 쉬지 않고 쿵덕거리며 돌고 돌았다.

달콤한 시간 뒤에 긴 침묵이 이어졌다.

금봉낭자는 뜨거운 열기와 열락을 오랫동안 유지하고 싶어 했다. 박달 도령이 땀으로 젖은 금봉낭자를 꼭 안아주었다.  

 “박달 도령님, 저를 잊지 않으실 거죠?” 

“내가 어찌 그대를 잊을 수 있겠소? 저 달님이 내려다보시고 계시잖소. 내 눈에 흙이 들어가기 전에는 아니, 저승에 간다한들 그대를 어찌 잊을 수 있겠소. 염려하지 말아요. 어제도 말했잖소. 과거에 급제하면 어사화를 꽂은 사모관대를 하고 제일 먼저 그대에게 달려오겠노라고.”

박달 도령은 아쉬움을 천천히 삭히고 있는 금봉낭자의 촉촉한 등을 다독거려 주었다.

 “도령님, 으흐흐흐흐흐흐 ......”

금봉이 어깨를 들썩거리며 흐느끼자 박달 도령도 코끝이 찡해왔다. 

“울지 말아요. 다 큰 처녀가 울면 어떻게 해?” 

“고마워서 그래요. 저처럼 보잘 것 없는 산골 소녀를 그리 대해주시니 너무나 고마워서 눈물이 나는 걸요.”

  “금봉이, 울지 말아요. 비록 짧은 인연이지만 십년을 같이 산 사람 같은 느낌이 들어요.” 

“박달 도령님, 으흐흐 흐흐......”

금봉낭자는 박달 도령의 품을 파고들면서 마치 어린 아이처럼 흐느꼈다.

 “울지 말래도요.”

  “박달 도령님, 이제부터 도령님의 모습을 영원히 가슴에 간직하고 살 거예요. 그러나 도령님께서 한양으로 떠나고 나면 전 어찌 살아가야 할지 겁이나요.” 

“어찌 살다니? 여태껏 잘 살아오지 않았소?” 

“그런 것이 아니라. 꿈에서도 뵌 도령님이 떠나고 나면 저는 희망이 없을 것 같아요. 그리고…….” 

“그리고?”

 “도령님이 한양에 가셔서 과거에 급제하면 다시는 저를 찾지 않으실 것 같은 불길한 예감이 들기도 하고요.”

금봉낭자는 풀이 죽어서 말하였다.

 “그런 말 하지 마오. 사내가 어찌 한 입으로 두 말을 한단 말이오. 절대 그런 일 없을 터이니 걱정하지 말아요.”

“알겠어요. 도령님, 소녀, 불철주야 도령님께서 과거에 급제하도록 천지신명님에게 빌고 빌게요.” 

“고맙소. 내 꼭 과거에 급제해 그대의 정성에 보답하리다.”

 “도령님.” 

 “금봉이.”

어느 정도 열기가 식었을 즈음 물레방앗간은 다시 구름이 일고 천둥이치기 시작하면서 소나기가 내렸다. 끈끈한 열정과 정염의 불꽃이 방앗간을 태우고 있었다.

두 사람이 물레방앗간을 빠져 나올 때 반달은 서산으로 기울고 있었고, 산에서 내려 온 안개가 마을을 뒤덮어 마치 산수화를 보는 것 같았다.

두 사람이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며 집으로 향했다.

간간히 동네 개들이 짖는 소리가 들려왔다. 자리에 누운 금봉낭자와 박달 도령은 쉽게 잠을 이루지 못했다.

 ‘아아. 어찌한다? 내가 괜히 인연을 맺었나? 내가 떠나가고 나면 금봉낭자가 견디기 힘들 텐데. 괜히 정을 맺어 번뇌를 키우는 거 아닌가? 만약, 만약 내가 과거에 합격하지 못하면 금봉낭자에게 너무 미안한 일이 될 테고 자칫 금봉낭자는 병이 날지도 모를 텐데.’

박달 도령은 뒤척거리다 잠이 오지 않아 책을 폈다. 

   子曰(자왈) 而識之(묵이지지) 學而不厭(학이불염) 誨人不倦(회인불권)  何有於我哉(하유어아재)  공자가라사대, 묵묵히 깨달으며 배움에 있어 싫어하지 않고, 남을 가르침에 게을리 하지 아니하니, 그 밖에 또 무엇이 나에게 있으리오.

 박달 도령의 낭랑한 글 읽는 소리가 금봉낭자 아버지와 어머니 그리고 방금 전 박달도령과 물레방앗간에서 사랑을 나누고 들어와 잠자리에 누운 금봉낭자의 귀에도 들렸다.

그 글 읽는 소리에 금봉낭자 가족은 잠을 잊었다. 

‘아아, 저 사람이 우리 금봉이와 짝을 이룬다면 얼마나 좋을꼬. 내 눈에는 금봉이와 천생 연분처럼 보이는데…….’

금봉낭자 아버지는 자리에서 일어나 궐련을 피우면서 혼자 속으로 말하였다.

박달 도령의 글 읽는 소리는 새벽까지 이어졌다. 산촌에 여간해서는 글 읽는 소리를 듣기 어려웠다. 잠을 제대로 자지 못했지만 금봉낭자 아버지는 기분이 좋았다.

 대개가 논과 밭을 경작하여 살아가는 전형적인 산촌 마을인지라 마을에 서당이 없었고 공부하는 사람도 거의 없었다. 새벽닭이 울고 나서야 박달은 글 읽기를 멈추고 잠자리에 들었다.

그런 산촌에 밤마다 글 읽는 소리는 금봉낭자 가족과 마을 사람들에게 화두(話頭)가 되었다.

금봉낭자 역시 박달 도령의 글 읽는 소리에 한숨도 자지 못했지만 금봉낭자는 개의치 않았다.

 “도령님, 도령님, 일어나셨어요?”

사랑채 마루에 세숫물을 떠다 올려놓고 금봉낭자가 박달 도령을 깨웠다.

이미 금봉낭자 아버지와 어머니는 들로 나간 뒤였다.

새벽까지 글을 읽느라 아침 늦게까지 잠자리에 있던 박달 도령이 방문을 열었다. 박달 도령이 금봉낭자와 눈이 마주치자 씩 웃어 보였다.

 “도령님, 세수하시고 아침 드셔야지요.” 

 “어? 벌써 이렇게 날이 밝았나?” 

 “해가 중천에 떴어요. 어서 일어나세요. 시장하실 텐데요?” 

“내가 늦잠을 잤나보구나.”

박달 도령은 기지개를 켜고 방에서 나왔다.

 “도령님, 곧 아침상 드릴 테니 어서 세수하세요.” 

 “그대가 나 때문에 고생이 많아요. 미안하구려.”

아침상을 들고 사랑채로 든 금봉낭자의 얼굴에 수심이 가득해 보였다. 상을 내려놓고 나가려는 금봉낭자를 박달이 불렀다.

 “잠시 앉아 봐요. 왜 무슨 일이라도 있어요? 안색이 안 좋아 보여요. 무슨 일 있어요? 말해 봐요.”

박달 도령이 금봉낭자에게 부드러운 미소를 지어 보였다.

 “도령님, 두렵사옵니다.”

  “무엇이 두렵단 말이오?” 

 “오늘이라도 도령님께서 떠나신다는 말씀을 하실까봐 저는 두려워 죽겠어요. 도령님이 떠나시면 저는 누굴 의지하고 살아야 해요?"

“떠나야하겠지요. 한양으로 과거를 보러가는 몸으로 벌써 여러 날을 이곳 벌말에서 머물렀으니 나도 천천히 마음이 급해지기 시작하네요.” 

“도령님, 좀 더 머무시면 안 되시나요?”

 “과거가 얼마 안 남아 내일이라도 한양으로 가야해요. 이제는 그대와 그대 아버지께서 지극 정성으로 잘 해주어 발의 상처도 다 아물었고 몸도 좋아 졌으니 떠나야하겠지요.” 

 “도령님, 아침 드시고 저와 가실 데가 있어요.” 

 “나와 갈 데가?” 

 “네에. 어서 조반부터 드세요.” 

 ‘갈 데가 어디인가?’

금봉낭자가 막 방을 나가려고 하자 박달이 금봉이 손목을 잡았다.

 “금봉이, 자 잠깐만. 잠깐만......”

박달 도령이 금봉낭자를 온기가 있는 이부자리 위로 앉혔다. 비록 잠은 제대로 자지 못했지만 금봉낭자의 두 뺨은 발가스름하게 물들어 있었다.

고개를 푹 숙인 금봉낭자는 아침 이슬을 머금은 한 떨기 백목련 같기도 했다.

 “금봉이, 사랑하오.”  “아이, 도령님, 밥상 앞에서 어떻게......” 

“상관없소. 밥상 앞이면 어떻소?”

금봉낭자는 박달 도령의 뜻을 잘 알고 있었기에 박달 도령의 요구에 순순히 응해 주었다.

금방 사랑채는 열기로 휩싸였다.

간밤에 물레방앗간에서 있었던 가슴 떨림이 남아 있는지 두 사람은 금방 달아올랐다.

뜨거운 입맞춤이 길게 이어졌고 탄성이 조용히 방문 밖으로 흘러나갔다. 고요하고 평화로운 산골에 활화산처럼 불꽃이 피어올랐다.

 “금봉이, 사랑하오.” 

 “읍-, 도령니임 -”

아침식사를 마친 박달 도령과 금봉낭자는 집을 나섰다.

금봉낭자는 동네 사람을 의식해 마을 뒤편으로 난 길로 박달 도령을 안내하였다.

곧 산길로 통하는 좁은 길이 나왔다. 산길을 조금 더 들어가니 우거진 숲이 나왔다.

참나무, 소나무, 상수리나무, 떡갈나무 등 푸르고 갈색 옷으로 갈아 입은 나무들로 산속은 음침했다. 금봉낭자는 박달 도령이 벌말에 처음 오던 날 밤 헤매던 이등령 방향으로 올라갔다.

 “어디 가는 건지 말해주면 안 되오?”

  “도령님, 맞춰보세요.” 

 “어딜 가는지 모르지만 기대가 되는데......”

두 사람은 방금 나눈 사랑 때문에 그런지 더욱 정답게 보였다. 박달 도령이 아무도 없는 산길에서 금봉낭자의 손을 잡아 주었다.

 ‘참으로 예쁘고 따뜻한 손이로다. 세상에 이렇게 고운 섬섬옥수가 다 있다니?’

박달 도령은 백설처럼 고운 금봉낭자의 손을 잡고 신기해하였다.

 “도령님, 누가 보면 어쩌려고요?” 

 “이 산속에서 누가 본다고요?” 

“혹시 알아요. 호랑이나 늑대가 보고 질투할지요?” 

“어? 하하하하......, 그럴 수도 있겠구먼.” 

“호호 호호호......” 

  “저기에요. 저기 보이시죠?”

금봉이 가리킨 곳은 성황당이었다.

천년 쯤 되보이는  느티나무가 기골이 장대한 거한(巨漢)처럼 떡 버티고 서있고 그 옆에 성황신을 모신 전각이 있었다.

성황당의 외양으로 보아 상당히 오랜 된 듯 했다. 그제야 박달 도령은 금봉낭자 자신을 이곳으로 데리고 온 목적을 알 수 있었다.

 ‘아아, 서낭당이구나. 나를 위하여 서낭신에게 빌러 왔나보구나. 고마운지고.’ 

“도령님, 저 돌 무덤에 돌을 몇 개 올려놓으세요.”

금봉 낭자가 길 옆에 있는 돌 몇 개를 집어 느티나무 아래 돌무덤 위에 얹어 놓았다. 그 행동이 얼마나 정성스러운지 박달 도령은 빙그레 웃으며 지켜보았다.

 “도령님, 제가 속으로 무슨 소원을 빌었는지 아세요?” 

“모르겠는데.” 

 “성황신에게 도령님 과거에 장원급제 하게 해달라고 빌었어요.” 

“어서, 도령님도 돌을 올려놓고 빌어 보세요.” 박달 도령은 금봉낭자 집어주는 돌을 정성스레 돌무덤 위에 올려놓고 두 손을 모으고 속으로 빌었다.

 ‘성황신님, 장원급제를 하여 금의환향할 수 있도록 도와주시고 금봉낭자를 굽어 살펴주소서. 이렇게 빌고 비나이다.’

박달 도령이 두 손을 싹싹 비비며 느티나무를 향해 고개를 반쯤 숙이고 또 숙였다.

박달 도령이 허리를 굽혀 예를 올릴 때마다 금봉낭자도 합장한 채 손을 비비며 박달 도령의 과거급제를 빌고 빌었다.

 - 계속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