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회

 “금봉 낭자, 처음 그대를 봤을 때 난 혼을 빼앗겼소. 어찌 이런 산촌에 선녀 같은 낭자가 있단 말이오?”
 “박달 도령님, 과찬이세요. 소녀는 그저 수수한 시골 처녀랍니다.”
 “아니오. 그대는 내가 지금까지 보아온 여인 중 가장 어여쁘고 아침 이슬을 머금은 한 송이 난초처럼 청순하오. 진심이오.“ 박달 도령은 어둡기는 하지만 금봉 낭자의 맑은 눈을 그윽이 바라보면서 두근거리는 가슴을 진정시키느라 애쓰고 있었다.
 “박달 도령님, 소녀를 놀리시면 싫습니다.”
 “아니오. 진심이오. 내 비록 과거를 보러가는 입장입니다만, 처음 낭자를 보았을 때 가슴이 울렁거리고 눈앞이 캄캄해서 아무것도 볼 수 없었다오.”
 “어머나, 진정이세요?” 금봉 낭자는 박달 도령의 달콤한 말에 살포시 고개를 들어 박달 도령의 조각처럼 반듯한 얼굴을 바라보았다.
 “그럼, 진정이고말고요.”
 “도령님, 소녀의 지금 심정을 말씀드려도 될까요?”
 “되다마다요. 말해보세요.” 금봉 낭자는 달빛에 희미한 박달 도령의 얼굴을 또 한 번 뚫어지게 쳐다보았다. 금봉 낭자의 시선이 어찌나 강하던지 박달 도령은 괜히 주눅이 들었다. 
 ‘아니, 이 낭자가 날 왜 이리 쳐다보는 거지?’ 박달 도령이 금봉 낭자를 바라보았지만 금봉 낭자는 넋이 나간 듯 박달 도령을 뚫어져라 바라보았다. 금봉 낭자는 지난 봄 처음 꿈속에서 만났던 사내를 떠 올렸다.
 춘삼월 금봉 낭자는 친구들과 이등령으로 봄나물을 캐러 아침 일찍 올라갔다. 금봉 낭자는 지천으로 핀 진달래를 바라보다가 그만 친구들과 헤어지고 말았다. 금봉낭자는 친구들을 찾는다는 것이 그만 점점 더 깊은 산속으로 더 들어가고 말았는데 생전 처음 와보는 산길로 접어들어 어디가 어딘지 알 수 없었다.
 ‘이상하다. 예전에 자주 다녔던 길 같은데......’ 금봉 낭자는 다시 되돌아 온 길로 나가기 위하여 길을 찾았지만 사방에 안개가 자욱하여 나가는 길을 찾을 수 없었다. 이리 저리 헤맨 끝에 어느 자그마한 오두막집에 이르게 되었다. 산 속을 헤매느라 허기도 지고 다리도 아파 그 집에서 잠시 쉬어 가기로 하였다. 어디서 고소한 밥 냄새가 났다. 시장기를 느낀 금봉 낭자는 자신도 모르게 부엌을 뒤지다가 방금 지은 밥과 반찬이 정갈하게 차려진 밥상을 발견하고 허겁지겁 먹기 시작하였다. 허기진 참에 먹는 밥은 꿀맛 같았다. 밥을 먹고 나니 졸음이 쏟아졌다.
 금봉 낭자가 얼마를 잤는지 모르고 일어났을 때 깜짝 놀라고 말았다. 아늑한 방안 아랫목에 자신이 이부자리 자리 위에 누워 있었다. 호롱불이 켜져 있어 방안의 살림살이가 희미하게 보였다. 갑자기 무서운 생각이 든 금봉 낭자는 방문을 열어 보았다. 사방은 이미 컴컴하고 별들이 마당에 내려앉을 듯 낮게 내려와 반짝거렸다. 잠시 후 인기척이 들리더니 웬 젊은 사내가 나타났다.
 “잘 주무시었는지요? 나는 이곳에 사는 사람입니다. 낮에는 산속에 들어가 나무를 하고 밤에는 책을 읽는 답니다. 제가 산에서 돌아와 보니 낭자께서 마루에 잠이 들어 있길래 방안으로 모셨습니다.” 사내는 공손히 금봉 낭자에게 자초지종을 이야기하며 금봉 낭자를 안심시켰다.
 “소녀가 큰 실례를 저질렀습니다. 주인도 없는 집에 들었습니다. 도령님, 용서하셔요.” 금봉 낭자는 일어나 반절로 인사하며 무안해 하자 사내는 빙그레 웃으며 신경 쓰지 말라고 하였다. 금봉 낭자는 너무 미안하여 사내의 얼굴도 똑바로 쳐다보지 못하였다.
 “도령님, 실례가 많았습니다. 이제 집에 돌아가 봐야 해요. 아버지 어머니께서 걱정하고 계실거에요.” 금봉 낭자가 방에서 나가려고 하자 사내가 일어나며 말렸다.
 “이미 밤이 깊었습니다. 이곳은 깊은 산속이라 지금 나가시면 호랑이와 늑대 같은 사나운 산짐승들을 만나기 쉽습니다. 이왕 저희 집에 드셨으니 이것도 인연입니다. 하룻밤 주무시고 가시지요.” 그제야 금봉 낭자는 살포시 얼굴을 들어 사내를 똑바로 쳐다보았다.
 ‘아아, 이럴 수가. 세상에 이렇게 잘난 남자가 이런 깊은 산중에 살고 있단 말인가? 아아, 말도 안 돼. 내가 지금 꿈을 꾸고 있는 거야. 꿈일 거야.’ 금봉 낭자는 사내의 선풍도골에 그만 넋을 잃고 사내 얼굴만 바라보았다.
 “낭자, 내 얼굴에 무엇이 묻었습니까?”
 “아, 아니옵니다.” 수줍음이 많은 사내 역시 고개를 옆으로 들고 금봉 낭자를 똑바로 보지 못했다. 사내가 용기를 내어 고개를 들고 금봉 낭자를 바라보았다.
 ‘아아, 아까 보았을 때도 아름다운 여인이었지만 이렇게 가까이 보니 정말로 보기드문 미색(美色)이로다. 우연한 인연으로 이 여인을 알게 되었지만 정말로 보기 드문 미인이야. 분명 하늘이 나의 외로움을 아시고 도우신 게 분명해. 어릴 때 들은 나무꾼과 선녀의 이야기가 오늘 나에게 일어난 거야. 그래 하늘이 나에게 기회를 주신 게 분명해.’ 사내는 마른 침을 삼키며 금봉 낭자에게 무슨 말을 하려고 하였지만 입 안에서 뱅뱅 돌뿐이었다.
 “저어......” 사내는 말을 잇지 못했다.
 “도령님, 말씀하셔요.”
 “낭자, 이것도 인연입니다. 저는 오래 전부터 천지신명님에게 저의 배필이 될 여인과 인연을 맺을 수 있도록 도와달라고 하였습니다. 제가 간절히 빌고 빈 결과가 오늘 나타난 것 같습니다. 저는 낭자를 처음 본 순간 천지신명님이 제 소원을 들어 주셨다고 생각하였습니다. 분명 낭자는 제 배필이 분명합니다. 낭자는 저의 배필이 되시기 위하여 이곳에 오신겁니다. 낭자가 이 집에 들린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닙니다. 낭자, 나와 백년가약을 맺어주십시오.” 사내는 정성을 다해 천지신명에게 기도한 결과로 금봉 낭자가 자신에게 스스로 찾아 온 거라고 믿고 있는 듯 했다.
 ‘어쩌면 이 도령의 말이 맞을지도 몰라. 지난해부터 아버지 어머니께서 나의 신랑감을 구하려고 백방으로 다니시면서 죽매장이들에게 손을 쓰고 계셨었어. 그러나 신랑감은 부모님이 정해줘야 하는데 산에서 우연히 만난 총각과 백년가약을 약속 할 수 없는데 어쩌나......’ 금봉 낭자는 다소곳하게 앉아서 사내의 훤칠한 외모만 바라보며 깊은 생각에 잠겼다.
 “낭자, 제 청을 들어주십시오. 저는 낭자를 아내로 맞이하고 싶습니다. 오늘 밤이 지나면 오늘의 인연이 모두 물거품이 될 것 같습니다. 부디 제 청을 들어 주십시오. 오늘밤이 지나가기 전에 정화수 한 그릇이라도 떠놓고 예를 올리는 게 어떠한지요?”
 ‘아아, 어찌해야 하나? 아버지 어머니에게 알리지도 않고 이 사내와 예를 올려야 하나? 그러나 너무나 잘생긴 이 사내를 결코 놓칠 수 없어. 어찌해야 하나......’
 “낭자, 제 청을 들어주세요. 저와 부부의 연을 맺는다면 이 목숨 다 하는 날까지 오로지 낭자를 위하여 살겠소. 진심이오.” 사내는 금봉 낭자 앞에 엎드려 애원하다 시피 했다. 이 밤이 지새면 아무 것도 존재하지 않을 것 같다는 생각은 금봉 낭자도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만난 지 얼마 되지 않는 생면부지의 사내와 예를 올린다는 것이 얼마나 무모하고 가당치않은 일일까 싶어 금봉 낭자는 주저하고 있었다. 금봉 낭자가 고민하고 있는 사이에도 사내는 금봉 낭자에게 자신의 청을 들어달라고 애원하였다.
 “낭자, 진심이오. 천지신명께서 나와 낭자의 인연을 맺도록 도우신 게 분명하오. 내 낭자와 인연을 맺게 된다면 심장이 멈추는 그 순간까지 그대를 인애하면서 오직 그대를 위하여 살 것이오. 믿어 주시오.” 사내의 간절히 비는 목소리가 얼마나 처절하던지 사내의 청을 들어주지 않으면 안 될 것 같았다.
 “좋아요. 도령님, 제가 도령님의 아내가 되어드리지요. 그렇지만 방금 저에게 하신 말씀대로 도령님이 세상 다하는 그날까지 저를 버리시면 아니 되옵니다. 약속 하실 수 있지요?” “그럼요. 그렇게 하구 말구요. 천지신명님께 맹서하겠습니다. 고맙습니다. 정말로 고맙습니다.” 금봉 낭자와 사내는 소반에 정갈한 정화수 한 그릇 올려놓고 예를 올렸다. 사내와 금봉 낭자는 맞절을 하며 서로의 얼굴을 훔쳐 보았다.
 ‘아아, 이것이 꿈인지 생시인지......’
 ‘천지신명님, 고맙습니다. 드디어 제가 원하던 낭자를 아내로 맞이하게 되었습니다. 이 한 목숨 다 바쳐 꽃처럼 어여뿐 아내를 인애하겠습니다.’
 사내와 금봉 낭자는 은은한 시선을 주고 받았다.
 “낭자, 고맙소. 내 그대를 죽을 때까지 인애하리다. 정말로 고마워요.” 우연히 발길이 닿은 산막에서 금봉 낭자는 낯선 사내와 인연을 맺고 달콤한 첫날밤을 맞았다. 화촉을 밝힌 금봉 낭자는 집으로 돌아가야 하는 것도 까맣게 잊고 밤마다 달콤한 신혼의 단꿈에 젖어 있었다. 화촉은 새벽 닭이 울 때 까지 꺼질 줄 몰랐다.
 “내 얼굴이 어디가 이상하오? 그리 쳐다보시니 내 마음이 이상해지네요.” 박달 도령이 긴 침묵을 깼다.
 “분명하옵니다. 분명하옵니다.” 꿈에서 본 그 사내가 박달 도령과 너무나 흡사하였다. 금봉 낭자는 현실과 꿈을 구분하지 못하고 몽롱한 상태가 되었다.
 “뭐가 분명하다는 건지요?”
 “박달님은 분명히 소녀의 꿈속에서 현몽하신 그 헌헌장부님이 분명하옵니다. 눈매며 입술 그리고 목소리 심지어 걸음걸이까지 똑같습니다.” 금봉 낭자의 목소리가 약간 떨리고 있었다.
 “내가 그대의 꿈속에 나타났단 말이오?” 박달 도령은 믿기지 않는다는 표정을 지어 보였다. 산골 처녀가 자신을 우습게 여겨 마음에도 없는 말을 꾸며대며 자신을 어떻게 해보려는 수작이 아닌가 하고 생각했다. 그러나 금봉 낭자의 말과 진지한 태도에서 박달 도령은 금봉 낭자가 자신을 속이려는 행동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혹시 내가 천년 묶은 여우에게 홀려 꿈을 꾸고 있는 것은 아니겠지?’
 박달 도령은 혀를 깨물어 보았다.
 “네에. 분명하옵니다. 분명히 소녀의 꿈 속에 수없이 나타나셔서 소녀를 인애하여 주셨사옵니다.” 금봉 낭자의 목소리는 차분하면서 정말로 믿지 않으면 안 될 것처럼 진실하게 들렸다.
 ‘인애?’
 “아, 그래요? 분명 내가 낭자의 꿈속에 나타나 인연을 맺었단 말이지요? 한두 번도 아니고 자주 나타나서요?” 박달 도령은 인연을 맺었다는 말에 눈을 크게 뜨고 점점 그 깊이를 알 수 없는 심연 속으로 빨려 들어가는 느낌이었다.
 “네에. 그렇습니다.” 금봉 낭자는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대답하였다.
 ‘아아, 내가 이 낭자와 전생에 무슨 인연이라도 쌓았었나? 나도 처음 보는 얼굴은 아닌 듯도 한데인데 내가 이 처녀의 꿈속에 수 없이 나타나 인연을 맺었다니? 이 건 또 무슨 예상치 못한 인연이란 말이냐?’ 박달 도령이 과거 길에 오르기 전에 오로지 사서삼경과 시문에 관련 된 서적을 붙잡고 씨름을 하다가 잠시 피곤에 지쳐 낮잠을 자면 언뜻 한 처녀가 나타나 살며시 웃으며 다가오다가 사라지고 다시 나타났다 사라지는 이상한 꿈을 몇 번 꾼 적이 있었다. 그때 마다 박달 도령은 그 꿈을 개꿈으로 치부하고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곤 했었다. 박달 도령이 공부하는 방 벽에  족자(簇子)가 걸려 있는데 남선(男仙)과 여선(女仙)이 그려진 그림이었다. 누가 언제 그 족자를 박달 도령이 사용하는 방의 벽에 걸어놓았는지 모르지만 박달 도령이 어릴 적부터 늘 보아 온 족자였다.
 남자 신선은 상의(上衣)를 반쯤 벗고 복숭아나무 아래서 술이 든 호리병을 들어 호탕한 자세로 마시고 있고, 날개옷을 입은 아리따운 여자 신선은 비파를 타면서  하늘을 날며 남자 신선에게 추파를 던지는 이상 야릇한 장면이었다. 박달 도령은  그림을 보면서 자신도 도술을 익혀 신선이 되면 저렇게 아름다운 여자 신선과 어울려 한 세상 멋지게 살고 싶은 상상을 하곤 했었다. 그러나 그것은 그림속의 떡이었다. 그런 그 족자의 그림에서 본 여자 신선의 모습이 이제 생각하니 금봉 낭자의 모습과 너무나 흡사했다.
 박달 도령이 집을 떠나기 전에 꾼 꿈을 생각해 냈다. 그 꿈이 너무 생생하여 박달 도령은 죽어도 잊을 수 없을 것 같았다. 박달 도령은 금봉이 옆에서 박달 도령이 깊은 산속을 가다가 그만 길을 잘못 들어 엉뚱한 곳으로 가고 말았다. 가도 가도 좁은 산길만 나올 뿐 이었다. 뒤를 돌아보면 지나 온 길이 보이지 않았다. 할 수 없이 앞으로만 갈수 밖에 없던 박달 도령은 겁이 덜컥 들었다. 그러나 그 자리에 서 있으면 길 양편에서 지네와 지렁이 같은 미물들이 박달 도령에게 달려들어 서 있을 수도 없는 지경이었다. 박달 도령은 더욱 겁에 질려 무조건 앞만 보면서 달리기 시작하였다. 얼마를 달렸는지 모르지만 이마에서 땀이 흐를 정도였다.
 좌우를 바라보며 아무리 빨리 달려도 똑같은 풍경만 펼쳐져 있을 뿐이었다. 이러다 산길에서 지쳐 집에도 돌아가지 못하고 죽는 게 아닌가하고 두려운 마음까지 일었다. 박달 도령이 잠시 서있으려니 이번에는 불그스름한 하늘에서 천둥소리가 들리면서 박달 도령 발 아래로 불덩이가 떨어졌다. 모골이 송연해진 박달 도령은 오들오들 떨면서 다시 앞을 바라보며 달렸다. 그렇게 서너 식경(食頃)을 더 달려가니 천 길 높이의 산이 나타났다.
 산길은 그 산 속으로 통하는 좁은 문으로 연결되어 있었는데 차마 무서워 그 문을 열고 들어갈 수 없었다. 쇠로 된 육중한 문 앞에 박달 도령은 어찌할 바를 모르고 사방을 두리번거리고 있을 때 어디선가 피리 소리가 나더니 홀연히 소를 탄 동자(童子)나 나타났다.
 “박달 도령님, 이곳까지 오시느라 욕보셨습니다. 지금부터 제가 도령님을 모시겠습니다. 이 소에 오르소서.” 선동(仙童)이 시키는 대로 박달 도령이 소 잔등에 올라타자 선동이 알수 없는 주문을 외었다. 곧 육중한 철문이 사르르 열렸다. 철문이 열리자 또 다시 동굴이 나타났다. 동굴 안은 푸른빛이 나면서 끝없이 뻗어 있었다. 마치 태풍에 구름이 흘러가는 듯 소는 빠른 속도로 달렸다. 박달 도령이 걸어 온 것만큼의 길이었으나 소의 걸음이 얼마나 빠르던지 귀에서 바람소리가 일었다. 그렇게 서너 식경을 달려 어느 집 앞에 도착하였다. 평소에 볼 수 없는 어머 어마하게 큰 집이었다. 박달 도령은 속으로 분명 임금이 사는 대궐이라고 생각하였다.

- 계속 -

 본 소설은 충북 제천시 백운면 “박달재”에 전해내려 오는 박달도령과 금봉낭자의 사랑 이야기입니다. 많은 관심과 사랑 부탁드립니다. 지난 이야기는 본지의 홈페이지 http://www.jcnews.co.kr 에서 다시 보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