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회

‘아아, 이런 첩첩 산중에 선녀라니? 내가 혹시 여우에게 홀리고 있는 것은 아닐까?’ 박달 도령은 허벅지를 꼬집어보았다. 허벅지에서 통증이 전해졌다. 방금 전에 본 금봉 낭자의 옆모습을 보았을 때도 첫눈에 반했었지만 가까이서 자세히 본 금봉 낭자의 얼굴은 달에 산다는 선녀 ‘항아’ 만큼이나 예뻤다. 오똑한 코, 짙은 눈썹, 하얀 치아, 붉고 촉촉한 입술, 뽀얀 얼굴, 섬섬옥수, 맑고 청아한 목소리, 향긋한 여인의 체취, 박달 도령은 금봉 낭자가 차려 온 저녁을 들 생각도 않고 금봉 낭자의 얼굴만 쳐다보았다. 도저히 산골에 살고 있는 처녀라고 믿기 어려울 정도로 금봉낭자는  곱고 아름다웠다.
 “소녀를 놀리시면 싫습니다. 시장하실 텐데 어서 드세요. 제 얼굴에 뭐가 묻었나요?” 금봉 낭자는 얼굴을 살며시 옆으로 돌렸다.
 “아, 아니요. 내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그대처럼 고운 낭자는 처음이오. 내가 지금 꿈을 꾸고 있는 것은 아니겠지요?” 박달 도령은 밥상을 앞에 놓고 아예 밥 먹는 것을 잊은 듯 했다.
 “네에?” 처녀는 얼굴이 화끈거려 더 이상 서있기 곤란하였다.
 “참으로 고우십니다. 정말로 참으로 고우세요.” 박달 도령은 넋을 잃고 처녀를 뚫어지게 쳐다보았다.
 “소, 소녀 이만 나가보겠습니다. 도령님, 식기 전에 어서 드세요.” 처녀는 박달 도령의 강렬한 시선에 더 있을 수 없었다.
 “고맙습니다. 잘 먹겠습니다.” 금봉 낭자가 사랑방에서 나왔을 때 이마와 가슴에 땀방울이 송알송알 맺혀있었고, 두근거리는 가슴을 진정하지 못해 냉수를 마셨다. 밤이 이슥해서 금봉 낭자의 부모님이 돌아왔다. 벌말은 이등령을 넘어 한양가는 길 한가운데 자리하고 있었기 때문에 예전에도 종종 밤길을 걷던 과객들이 금봉 낭자네 집에 들어 하룻밤 묵고 간적이 있었다.
 금봉 낭자는 아버지에게 박달 도령이 사랑채에 들어있는 사실을 알렸다. 금봉 낭자 아버지는 박달 도령이 든 사랑채에 나가 박달 도령과 마주하였다. 훤칠하고 예의바르게 보이는 박달 도령의 인품이 마음에 든 금봉 낭자의 아버지는 마치 사윗감을 마주하고 있는 듯한 착각에 빠졌다. 또한 한양으로 과거를 보러가는 박달 도령이 과거에 급제라도 하는 날이면 하룻밤 묵은 인연으로 좋은 일이 일어날 것만 같았다.
 ‘내 지금껏 우리 집을 묵어간 과객이 수백 명은 되는데 이렇듯 훤칠하고 예의 바른 사내는 처음이로다. 정말로 귀티가 흐르고 잘 생겼어. 정말 아까운 총각이로구나. 이러한 총각과 내 여식이 맺어진다면 얼마나 좋을꼬?’ 금봉 낭자의 아버지 역시 박달 도령의 첫 상면에서 마음을 빼앗겼다. 금봉 낭자 아버지는 상상의 나래를 펼쳤다.
 “여식이 아직 어린지라. 어떻게 저녁은 드셨는지요?” 금봉이 아버지는 정중한 자세로 박달 도령을 맞이했다.
 “밤에 주인도 없는 집에 불쑥 나타나 실례가 많았습니다. 저녁은 따님께서 차려주셔서 잘 먹었습니다. 저는 영남에 사는데 한양으로 과거를 보러가던 중에 그만 길을 잃어 어떻게 하다가 이곳까지 오게 되었습니다. 밤도 깊고 하여 어르신 댁에서 하룻밤 묵어가고자 합니다.” 박달 도령이 반쯤 일어나 예를 갖추자 금봉 낭자 아버지도 반쯤 자리에서 일어나 박달 도령의 예에 응답하였다.
 “아닙니다. 이틀도 좋고 열흘도 좋습니다. 괘념치마시고 쉬셨다 가십시오. 그리고 보아하니 산속을 헤매시다 다치신 모양입니다. 우리 집에서 며칠 쉬시면서 상처를 치유하도록 하십시오. 이 밤에 혼자 저 험한 재를 넘느라 욕보셨습니다. 이등령은 보기보다는 아주 험난한 재입니다. 그 것도 낮이 아닌 밤에 넘어오시다가 길을 잃고 헤매셨다니 정말 큰일 날 뻔했습니다. 영남의 과객들이 저 재를 넘다가 자주 험한 일을 당하기도 하지요. 도령은 참으로 운이 좋으셨습니다.” 금봉 낭자 아버지는 후덕한 인품의 소유자로 손님이 자신이 집에 오는 것을 좋아 하였다. 농사도 많아 다른 집들보다 살림이 넉넉한 편이라 과객들이 하루 이틀 머물다 가는 것에 크게 신경 쓰지 않았다.
 “정말 고맙습니다. 제가 어두운 산길을 헤매다가 넘어져 좀 다쳤습니다.” 박달 도령이 다리에 난 상처를 보여주자 금봉 낭자 아버지는 상처를 이리저리 살펴보고 약초를 으깨서 상처에 바르고 무명천 조각으로 정성껏 싸매주었다.
 “어르신, 고맙습니다. 이 은혜를 어떻게 갚아야 할지요?” 박달 도령은 금봉 낭자 아버지가 상처를 어루만지며 마치 보물을 다루듯 하자 고맙기도 하고 미안하기도 했다.
 “과거를 보러가는 귀한 몸이시니 빨리 상처가 아물어야지요. 약초를 발랐으니 금방 나을 겁니다.”
 안동, 영양, 봉화, 울진, 영주 등에 거주하는 영남지역 사람들은 한양으로 가려면 죽령(竹嶺)을 넘어 제천의 험준한 시랑산의 이등령을 넘어야 하기 때문에 수백 년 동안 과거를 보러 한양으로 향하는 수많은 영남 선비들은 이등령에 무수한 발자국 남겼다. 그러나 험준한 재를 혼자 넘는 다는 것은 그리 간단한 일이 아니었다. 
 시랑산 일대에는 자주 산 도적이 출몰하여 한양으로 향하는 사람들을 괴롭혔다. 또 호랑이가 나타나 사람을 잡아먹는다는 흉흉한 소문이 꼬리를 물고 있어 어른이라고 하여도 혼자서 재를 넘는 다는 것은 목숨을 걸지 않으면 감행하기 힘든 일이었다. 어쩌다 초행길의 사내들이 험한 산세를 모르고 재를 넘다 길을 잃어 변을 당하는 경우도 있었고 다행히 길을 헤매다 박달 도령처럼 시랑산 아래 벌말에 발이 닿아 면 하룻밤 묵어가곤 했다. 
 피곤하였지만 선녀처럼 보기 드문 산골 처녀에게 혼을 빼앗겨 버린 박달 도령은 쉽게 잠을 이룰 수 없었다. 자리에 누웠다 일어났다를 반복하였지만 좀처럼 금봉 낭자의 아리따운 자태는 과거를 보러가는 박달 도령의 가슴을 들뜨게 하였다. 그러나 남녀가 유별하며 하룻밤만 묵고 떠나야하는 자신의 신세가 안타깝고 처량해 보였다. 잠을 청하려 하여도 금봉 낭자의 아리따운 자태가 눈앞에 아른거렸다. 천정에도 방바닥에도 심지어 책을 읽으려고 책을 펼쳐도 온통 첫눈에 박달 도령의 시선을 잡은 산골 처녀의 아름다운 모습뿐이었다.
 ‘한 사나흘 묵었다 갈까? 금봉 낭자 아버지도 나를 싫어하는 표정은 아닌 것 같은데 마침 다리도 다치고 몸에 신열이 약간 있기도 하고......’ 박달 도령은 잠이 오지 않아 밖으로 나왔다. 방을 나와 마당을 서성거리다 밖으로 바람이나 쐬러 나갔다 와야겠다고 마음먹었다. 대문 빗장이 질러져있지 않았다. 누군가 집으로 돌아 올 사람이 있다는 뜻이었다. 박달 도령은 집을 나와 동구 밖을 향해 걸었다. 처음에는 자세히 보지 못했지만 천천히 둘러보니 마을은 산세가 수려했다. 커다란 두 산이 좌우측에서 마을을 품어주는 형상이어서 아늑하고 포근해 보였다. 좁은 마을길을 따라 한참 걸으니 물소리가 들렸다.
 늦가을이지만 풀벌레소리가 사방에 진동했다. 은하수가 밤하늘에 하얗게 흩뿌려져 있는데 금방이라도 눈꽃으로 변해 떨어질 것 같았다. 반달이 하늘 한가운데에서 서천으로 유유히 흐르고 있었다. 달빛에 자세히 사방을 살펴보니 사방이 희미하게 보이기 시작했다. 멀리서 자신이 넘어 온 시랑산과 구학산이 산신령 할아버지처럼 떡 버티고 앉아서 벌말을 굽어보고 있었다. 그 모습이 너무 장엄하고 온후하여 보는 사람들의 시선을 압도하고도 남았다.
 박달 도령은 물소리가 들리는 곳으로 자신도 모르게 발길을 옮겼다. 저 만치 조그마한 집이 희미하게 보였다. 물레방앗간 같았다. 박달 도령은 물레방아를 가까이 보고 싶었다. 박달 도령의 고향집 옆에도 물레방아가 돌고 있었다. 물레방아가 있는 곳에 가까이 왔을 때 박달 도령은 갑자기 걸음을 멈추었다. 물레방아가 돌고 있는 옆에서 인기척을 느꼈기 때문이다.
 “달님, 달님, 이 소녀의 말씀 좀 들어보세요. 오늘밤 소녀는 꿈속에서 만났던 임을 만났습니다. 그러나 그 분은 한양으로 과거를 보러 가시는 분이랍니다. 소녀가 꿈속에서 뵙던 분이 분명합니다. 어떻게 하면 제가 그 분에게 제 마음을 전할 수 있겠는지요? 달님, 대답 좀 해주셔요.” 소녀의 목소리는 더욱 간절하여 달님이 반드시 소녀의 청을 들어 줄 것만 같았다. 박달 도령은 자신의 귀를 의심하였지만 목소리의 주인공은 금봉 낭자가 분명하였다.
 ‘아아, 이렇게 늦은 밤, 금봉 낭자가 잠도 자지 않고 홀로 나와 있다니.......’ 박달도령은 방금 금봉 낭자가 혼잣말로 한 그 임이 자신이란 것을 알고 가슴이 뭉클하면서 한편으로 울렁거렸다.
 ‘낭자도 나와 같은 감정이로구나. 그러나 난 내일이면 한양으로 과거를 보러 떠나야 할 몸으로 우연히 만난 산골 처녀의 가슴에 상처를 줄 수 없는 일이다.’ 박달 도령은 속으로 고민하였다. 지금 금봉 낭자 앞에 나타나면 그녀와 사랑에 빠져 아무것도 할 수 없을 것 같았다. 그렇다고 첫눈에 반한 그녀에게서 도망친다는 것은 사내로서 할 행동이 아니라고 생각하였다.
 ‘그래, 이왕 이렇게 된 것을 내 스스로도 이 야릇한 감정을 숨길 수 없어. 다가가보는 거야.’ 박달 도령은 길게 호흡을 서너 번하고 헛기침을 하고 천천히 금봉이 앞으로 다가갔다.
 “어머나, 바, 박달 도령님. 밤이 이슥한데 안 주무시고요?” 금봉 낭자는 깜짝 놀라면서도 박달 도령을 은근한 시선으로 바라보았다. 달빛을 받은 박달 도령의 조각 같은 얼굴이 더욱 단아하고 고매하게 보였다. 
 “잠을 청할 수 없어 잠시 바람이나 쐴까하고 나왔습니다. 그런데 이곳에서 낭자를 만나다니 참으로 반갑고도 기이한 인연입니다.” 달빛을 받은 박달 도령과 금봉 낭자의 얼굴은 희색이 가득해 보였다.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은밀한 만남에 두 사람은 묘한 감정이 들면서 열정이 서서히 피어올랐다.
 “소녀도 잠이 오지 않아 바람 쐬려고 잠시 나왔습니다.” 금봉 낭자는 고개를 푹 숙이고 무슨 죄를 지은 사람처럼 서있었다. 박달 도령은 금봉 낭자 곁으로 다가가 속삭였다.
 “남녀가 유별한데 혹 누가 볼까 두렵습니다. 우리 저쪽으로 걸어요.” 박달 도령이 가리키는 곳은 컴컴하게 숲속으로 난 오솔길이었다. 금봉 낭자는 그쪽으로 가면 이등령 방향으로 올라가는 곳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그러나 오솔길을 걸어간다고 한들 쉴만한 곳이 없었다. 계속 산속으로 이어지는 길을 걷다가 마을 사람들 눈에 띄면 괜한 구설수에 오를 수도 있기에 금봉 낭자는 다른 곳을 찾으려고 하였다.
 “저어, 박달 도령님, 저 길로 걸어가도 앉아서 쉴 곳이 없어요.”
 “그래요? 그럼 어쩐다?” 금봉 낭자는 잠시 뭔가 생각하는 듯 하더니 손을 들어 물레방앗간을 가리켰다.
 “박달 도령님, 물레방앗간 안에 쉴만한 공간이 있긴 한데......” 금봉 낭자는 손가락을 입에 물고 땅바닥만 쳐다보았다. 물레방앗간 안에는 볏가마니나 멍석이 있지만 어른 두 서너 명은 충분히 앉아서 쉴 수 있었다. 늦은 밤 물레방앗간 앞에 낯선 남자와 서 있다가 마을 사람들 눈에 띄면 좋지 않은 소문날 것이 뻔 하기 때문에 금봉 낭자는 오래 물레방아 앞에 서있을 수도 없었다.
 그렇다고 꿈에서 만난을 임이 앞에 서있는데 그냥 이대로 집으로 돌아 갈 수도 없었다. 금봉 낭자는 박달 도령이 자신의 꿈속에 나타난 그 사내가 분명하다고 확신하고 있었다. 꿈속의 사내가 현실 세계에 나타나 자신의 앞에 서있다는 것에 감동하면서도 꿈의 진실을 알고 싶었다.
 ‘아, 어쩐다? 비좁은 방앗간 안에 들어가면 기분이 좀 이상할 텐데......’ 금봉 낭자는 손가락을 입에 물고 잠시 뭔가를 생각하는 듯 하다가 박달 도령에게 방앗간 들어가는 문을 가리켰다. 금방 마을 사람들이 나타날 것 같아 조바심이 났다.
 “저를 따라오세요.” 금봉 낭자가 물레방앗간 문을 열자 다행히 문이 사르르 열렸다. 방앗간 안에는 볏가마니가 쌓여 있었지만 두 사람이 앉을 공간이 있었다. 방앗간으로 들어온 금봉 낭자는 얼른 문을 잠갔다.
 “지금은 여기 밖에 없어요. 밖에 돌아다니다가 마을 사람들이 보면 곤란해요. 잠시 여기서 이야기해요.” 희미한 달빛이 엉성한 문틈 사이로 들어왔다. 박달 도령을 바라보는 금봉 낭자의 시선은 촉촉해져 있었다. 금봉 낭자가 빈가마니 위에 앉고 그 옆으로 박달 도령도 앉았다. 자연스럽게 두 사람이 밀착되었다.

 - 계속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