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 성 범   전 제천교육장, 세명대 외래교수

차가운 바람이 옷깃을 여민다. 아니 겨울도 아닌데 제법 얼굴이 시리다.
얼마 전 까지만 해도 이제는 완연히 봄이라고 가벼운 옷차림으로 생활을 해왔건마는 이제 다시 겨울이 찾아왔는지 살포시 눈마저 도로에 내렸다.
분명 장관이다.
불과 며칠사이에 두 계절을 한 번에 느낄 수 있으니 이것 또한 감사가 아닌가 말이다.
아마 아름다운 봄꽃을 피울까봐 시샘하는 동장군의 모습인가보다. 하지만 이미 대지 속에는 오래전부터 새봄을 준비하고 얼은 땅을 헤치며 자신의 모습을 드러나기 위하여 몸부림을 쳐 왔을 것이다.
어쩌면 이것은 우리의 삶에도 많은 것을 시사하고 있는 지도 모른다.
모든 일이란 하루아침에 이루어 질 수 없다는 평범한 진리를 우리로 하여금 소중한 자연을 통하여 일깨어 주기에 충분하다.
그러기에 자연은 말없는 우리의 스승이 아닐 수 없다.
혹자는 이렇게 이야기하기도 한다.
고통 없이는 결단코 영광이 없다고 말이다.
그런데 대부분의 사람들은 겉으로 드러난 결과만 보고 참 운이 좋았다고 하며 내심 부러워하는 지도 모른다.
하지만 거기에는 분명 나름대로 그 일을 이루기 위하여 전심전력은 물론 혼신의 힘을 기울였을 것이다. 며칠전 저녁에도 전과 다름없이 매주 월요일이면 찾는 곳이 있어 발걸음을 분주하게 옮긴다.
다름아닌 야학교이다.
조금의 언덕에 있지만 이 언덕을 올라 교실문을 들어 설때면 세상의 모든 근심을 잊어버린 듯이 마음이 가볍기 그지없다.
때로는 조금 늦을 경우가 있어 헐레벌떡 문을 열면 기다리고 계시던 연세 지긋한 학생(?) 분들이 선생님, 어서 오세요. 숨 좀 돌리시고 수업해 주세요. 무슨 차를 드릴까요? 커피, 녹차, 생강차 마음대로 잡수셔요 하시면서 차를 권하신다.
참으로 고맙기 그지없다.
도대체 내가 뭐 길래 이처럼 정성껏 섬긴다는 말인가? 부끄럽고 죄송하다.
이분들이 이루고자 하시는 중ㆍ고등학교 졸업 검정고시 시험 준비에 얼마나 도와 드렸는가를 뒤돌아보니 고개를 들 수가 없다.
일찍 오셔서 교실을 청소하시고 칠판을 닦으시며 가지런히 책상 줄을 정리하실 뿐만 아니라 제가 쓰는 교탁까지도 닦고 또 닦고 하신다.
어느 학교에서도 쉽게 볼 수 없는 수업태도는 존경을 떠나서 경이함까지 갖게 하신다.
이런 자리에서 나는 어떤 모습으로 그 분들을 섬겨드렸나 하고 생각하니 몸 둘 바를 모른다.
아니 섬겨 드리는 것은 고사하고 혹시 교만하지는 않았는지 하는 생각마저 드니 눈앞이 캄캄해진다.
이러지는 않았겠지만 내가 그 분 들보다 조금 일찍 배워서 조금 일고 있는 얄팍한 지식을 이 분들에게 알려드리는 그 자리에 섰다고 섬김을 받는 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하지는 않았는지 말이다.
이런 생각들이 뇌리를 스치고 지나가니 오늘따라 더 열심히 그분들을 섬겨 드려야 한다는 마음이 앞선다.
책장 한 페이지 한 페이지를 넘길 때마다 그분들과 서로 소통하며 이해여부를 여쭈어 보니 그분들도 무척 좋아하신다.
어느 한분은 이렇게 말씀하시곤 한다.
선생님, 사실 문법이 조금 어려워서 이해가 잘 가지 않았는데 오늘 선생님께서 잘 모르시면 다시 제가 말씀 드리겠다고 하셔서 저도 용기를 내어 모르는 문제를 여쭈어 보았다며 이제는 하나라도 제대로 알아서 무척 기쁘다며 환한 얼굴로 말씀해 주셨다.
저도 감사합니다 라고 다시금 인사를 드렸지만 내심 죄송한 마음이 앞섰다.
진도문제로 아니 단기간에 과제를 해결하기 위해 나 중심의 수업을 해 오진 않았나 하는 마음 때문에 마음이 불편했다.
연세가 드신 분들이 그 때 생활이 어려우셔서 배움의 기회를 놓쳐 늘 마음 한 구석에 배움의 갈급함을 잊지 못해 낮에는 바쁘시게 일을 하시고 저녁도 채 잡수지 못하시고 책가방을 들고 언덕위에 야간 학교를 찾아오시는 그분들이 한없이 존경스럽다.
가끔 쉬는 시간에 자녀에 대해 여쭈어 보면 자식 자랑에 목소리가 갑자기 높아지신다.
잘 키우셨다. 저마다 사회의 구성원으로 제몫을 잘 감당하고 있다고 뿌듯해 하신다. 정말 대단들 하시다.
이러한 훌륭하신 분들의 부모님이 계셨기에 오늘의 우리가 당당하게 서있지 않는가 말이다.
그렇다. 배움을 나눔은 오히려 배우는 것이다.
그분들을 만나 뵈올 때 마다 나 자신을 조용히 성찰해본다.
오늘도 수업을 마치고 교실 문을 나서며 마음속으로 기도해본다.
지금까지 열심히 준비해 오신 그분들에게 검정고시 합격증이 꼭 두 손에 쥐어 지시길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