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 성 범   전 제천교육장, 세명대외래교수

며칠 전 아침 모처럼 신선한 공기의 맛을 즐기려고 들녘을 따라 산책길을 나섰다.
여러 사람과 만나 가벼운 목례에서부터 두 손을 잡고 오랜만에 여기서 뵙겠다며 반가워하는 지인들을 뵙기도 하며 잘 만나지 못한 동창들도 만나고 선후배도 만날 수 있었다.
아침을 여는 모습 또한 다양하다.
어떤 분들은 자전거에 작은 라디오를 부착해 쉼 없이 페달을 밟으며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각종 뉴스정보를 듣기도 하고 그런가하면 젊은 친구들은 스마트폰을 켜고 남에게 피해를 주지 않기 위해 이어폰으로 자기만의 정보를 얻으며 힐링을 하기도 한다.
어디 그뿐이랴 정겨운 부부끼리, 사랑스런 연인끼리, 오붓한 가족끼리 함께 거닐기도 하고 공원 한 곳에는 40대 중반으로 보이는 남녀 십여 분들이 리더의 지도아래 가벼운 체조로 아침을 여는 분들도 있다.
모두가 행복한 모습들이다. 행복은 혹자의 말처럼 먼 곳에 있는 것이 아니라 가까운 곳에 있는 것 같다.
나 또한 여러 사람들과 어울려 산책을 하며 아름다운 야생화가 있으면 서투른 솜씨지만 스마트폰으로 마치 수준 높은 작가처럼 포즈를 취해가며 다양한 각도로 정성껏 촬영해 보기도 한다.
그런가하면 논두렁길을 거닐며 어느새 실하게 자라준 벼들에게 고맙다는 무언의 마음을 전해 보기도 한다.
이처럼 어느 아침보다 상쾌한 기분으로 목적지에 이르러서는 남들이 보든 말든 한 구석에서 초등학교 때 배운 국민체조를 나 혼자 구령을 붙여가며 해본다.
오랜만에 해보는 체조이지만 그래도 크게 잊어버리지 않고 할 수 있었던 것은 학생 때 매주 월요일마다 조회가 끝날 즈음 전교생이 국민체조 음악에 맞춰 체조를 했었기 때문이리라.
어쩌면 교육은 반복된 연습의 결과인 것 같다.

어느 정도 시간이지나 아침식사도 해야 되고 다녀올 곳도 있고 해서 되돌아오는 중에 건널목신호등을 만나게 되었다.
함께 기다리고 있던 50대 중반의 두 남자는 갑자기 좌우를 살피더니 천연덕스럽게 건널목을 건너는데 마치 개선 장군인양 건넌다.
옆에 있던 40대 후반 여자 한분도 기다리는 것이 지루한 모양인지 주위를 살피더니 빠른 걸음으로 건널목을 건넌다.
불과 얼마 되지 않아 안전하게 건너라는 초록불이 들어왔다.
나는 그분들을 곧바로 만날 수 있었다.
그런데 먼저 건너온 남자들은 여자를 향해 “아무도 없으면 건너오라는 것 아니예요? 규정을 지키면 손해 보다니까요?” 하니 듣고 있던 여자가 맞아요, 그래서 저도 왔어요. 저는 융통성이 없어서 늘 그래요 하며 맞장구를 치고는 저마다의 갈 길을 향해 발길을 옮긴다.
이 말을 듣는 순간 마음이 아프다. 어쩌다 우리 삶의 여정에 규정을 지키면 손해 본다는 인식이 자리 잡고 있는 지, 그리고 규정을 지키는 것은 융통성이 없는 것이고 규정을 지키지 않는 것은 융통성이 있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지 말이다.

무릇 융통성의 사전적 의미는 하드웨어나 소프트웨어의 구성 요소가 특정한 부분의 교체 없이 쉽게 변경되고 확장될 수 있는 성질이라고 명시되어 있다.
이는 변화하는 상황에 적응할 수 있도록 현상을 변화시키는 능력으로서 즉 고정적인 사고방식이나 시각 자체를 변화시켜 다양한 해결책(problem- solving)을 찾는 능력이다.
하지만 우리가 단순한 계략이나 비도덕을 포함하는 속임수를 융통성이라고 칭하지는 않는다.
그렇다. 융통성은 누구에게나 세상을 살아가는데 대단히 중요한 문제가 아닐 수 없다. 우리의 삶 자체가 일정한 공식처럼 법과 규정만으로 살수 없기 때문이다.
인생의 성공과 실패, 인간관계나 업무의 처리 등에서 원칙과 상황을 고려한 융통성의 문제가 대단히 중요한 비중을 차지한다.
그런데 법을 잘 지키며 원칙대로 살려고 하면 남들이 융통성이 없다고 한다.
융통성이 없다는 것은 고지식하다는 뜻이니, 결코 기분 좋게 들을 수는 없는 일이다.
또 작은 일이라도 법과 규정을 어기고 나면 마음이 떳떳하지 못하고 꺼림칙한 것은 어찌할 수가 없다.
모처럼의 아침산책을 마치고 돌아와 혼자서 또 다른 고뇌에 쌓여본다. 무릇 융통성을 신장시키는 지름길은 항상 기본원칙에 충실한 가운데, 고정적인 사고의 틀에서 벗어나 발상 자체를 전환시켜 유연하고 독창적인 사고행위를 반복하는 것이 아닐까 말이다.